* 론테 님 커미션 (@flowerfumes)
#우영천
우시지마는 하루카의 뒤에 서서 한참이나 손을 꼼지락거렸다. 배구공을 한 손에 쥐는 커다란 손으로 흑단 같은 머리카락의 결을 따라 계속 만지작거리던 그는 뭔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뒤에서 물러났다.
잘… 안 묶인다.
처음이라 그래 처음이라~ 그렇게 말하며 하루카는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거울 앞에 앉아있느라 비친, 여과 없이 바로 보이는 자신의 모습은 여기저기가 온통 엉망으로 삐쭉 흘러나온 머리카락이 제일 인상적이었다. 그래도 땋으려다 말았다는 것의 형태가 보였다는 것이 다행이려나.
푸하하, 와카토시 군, 이런 건 영 못하는구나!!
…처음이라 그렇다.
옆에 의자를 끌고 와, 등받이에 팔을 걸친 상태로 턱을 괴고 앉아있던 텐도는 아예 포복절도하며 눈물까지 찔끔 흘렸다. 한참이나 이어진 텐도의 웃음소리에 하루카도 푸흡, 하고 잇새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차마 막아내지 못하였다.
아, 와카 미안해…
괜찮다.
토리는 반 애들이 안 찾아?
으음~~~? 당연히 찾지!! 난 미라클 보이라고!! 뭔가 얼굴 옆으로 별이 반짝반짝 뜰 것만 같은 추임새를 넣으며 텐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치만 하루룽이 더 중요하니까, 라고 흥얼거리며 우시지마를 향해 손을 쫙 뻗는다. 그의 손을 우시지마가 끔뻑이며 바라보자 텐도가 머,리,끈! 글자 하나하나에 강세를 주며 머리끈을 그의 손에서 쏙 빼왔다. 손목에 끼워 흔들거리는 머리끈을 따라 팔도 흔들거리던 텐도는 자신만만하게 하루카 뒤에 섰다.
눈 감기~ 응. 고분고분 대답하며 사르르 눈을 감자 머리에 와닿는 손길이 더 섬세하게 다가왔다. 얼기설기 엮여있던 머리칼을 풀어내는 것만으로도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카락을 빗어넘기는 손길과 두피가 간질거리는 감촉이 사라졌다. 이제 눈 떠봐. 금세 하루카의 단장을 끝낸 텐도가 거울 속에 비친 그녀를 향해 드라마틱하게 두 손을 펼치며 물었다.
어때~?
와-!!
절로 나오는 탄성이었다.
사토링 손재주 엄청 좋잖아!! 라는 감상에 뒤이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피던 하루카는 반색을 표하며 두 손을 짝 맞부딪혔다.
텐도의 기다랗고 얄팍한 손가락은 생각보다 거침없이 움직여 하루카의 머리칼을 아까와는 다른 형태로 틀어 올렸다. 트레이드마크처럼 굳어진 포니테일이 아니라 돌돌 만 스파게티 면을 양쪽에 단 것만 같은 머리였다. 모양새도 귀여운데 고개를 돌릴 때마다 기다란 머리칼이 휘둘려 얼굴에 찰싹 달라붙지도 않았고, 목덜미가 훤히 드러나 땀이 차지도 않을 것이다. 활동량이 평소보다 배는 많을 오늘 같은 날엔 제격이었다. 그러다 너무 상반된 반응을 보인 것이 아닌가 싶어 곁을 힐긋 살피자 우시지마는 넉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한 번 위아래로 가볍게 끄덕였다.
잘 어울린다 하루.
우시지마까지 마음에 든다고 하니 이보다 더 완벽한 머리가 있을까.
그럼 나 이 머리로 할래~!
움직이기도 좋고 평소와는 색다른 머리가 잘 어울리는 날. 오늘은 체육대회 날이었다.
10월 초순, 가을 하늘은 청명했다. 안 그래도 높던 하늘이 구름마저 없으니, 고개를 위로 꺾으면 끝이 어디까지인지 가늠도 못 할 정도의 깊은 하늘이 시야에 가득했다.
제일 안쪽에선 태양의 기색이 완연했다. 둥근 구체가 고르게 내뿜는 강한 빛은 사방으로 가시광선을 한 겹 더 덧대어 천지의 것들이 두르고 있는 색채를 한층 더 진하게 칠하는 듯했다. 그에 온통 짙푸르던 잎새들의 끝에 도래한 가을이 붉고 노란 원색으로 존재를 알린다.
여름의 무더위는 가셨으나 눈이 쨍하다고 느껴질 정도의 광량이었기 때문에 우시지마는 건물 밖을 나서다 말고, 신발 끈을 꽉 동여매고 있는 하루카를 살폈다.
더울 것 같은데 괜찮겠나.
말이 끝나자마자 교정에 핀 나무들의 이파리를 우수수 흔들리게 할 정도의 서늘한 가을바람이 둘 사이의 공간을 통과한다. 아직도 나뭇가지의 끝에 굳건히 매달려있던 낙엽 몇 장이 바닥에 천천히 떨어지다 다시 바람을 타고 붕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으음… 괜찮을 것 같은데?
바람도 불잖아. 땀을 흘리고 바로 찬 바람을 쐬면 감기에 걸릴 수도 있는데, 한차례의 잔소리를 예고하는 우시지마의 등을 하루카는 이어질 우려와 함께 건물 밖으로 가볍게 밀어냈다. 나 그 정도로 약골은 아니거든, 투정 섞인 어름을 포함하면서. 이미 멀리서 펄쩍대는 텐도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붉은 잎사귀 같았다.
개최식이 끝나고 각자의 경기들을 위하여 흩어지는 아이들 사이에서 하루 하는 우시지마와 텐도에게 힘내라는 응원을 전해주곤 아이들을 따라 몸을 풀었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는 것이 취향은 아니었지만, 반 대항전에서 빠질 수는 없었으니까. 가볍게 목을 이리저리 돌리다 보니 벌써 운동장의 반대편 쪽에서 경기를 하는 남학생들이 보인다. 3학년의 종목은 피구로 결정이 났다. 단체 줄넘기라면 분명 뛰다가 지쳤을 거야. 하루카는 속으로 안심을 하며 스트레칭을 마저 했다.
삐익-
휘슬이 올림과 동시에 공이 하늘에 붕 띄워졌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구름처럼 하얗게 떠오르는 공에 아이의 손끝이 툭 닿자 이번엔 중력이 그것을 끌어당긴다. 공중에 던져진 것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반대편 코트를 향해 공이 낙하한다.
잡아! 언성을 높인 여학생이 속한 코트를 거점으로 공의 운동 방향이 또 한 번 뒤바뀐다. 흡사 투수의 포즈를 모방하여 날린 공이 파공음을 내며 주변을 가른다. 갈라진 아이들의 파도 속에서 공이 미처 피하지 못한 누군가의 다리에 정확하게 꽂히자 둔탁하게 퍽, 하는 파찰음이 터졌다. 공은 아이의 다리에 맞고 다시 땅에 툭 떨어진다. 이번에 공을 주워든 것은 하루카가 속한 3학년 3반의 아이였다. 다리를 비비적거리며 나가는 반 친구를 안타깝게 쳐다보던 3반 아이들은 금세 눈에 불을 켜며 공을 쥔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우리 반 애를 때려? 너넨 다 죽었어.
그 뒤로는 공의 궤적이 실시간으로 바뀌었다. 직선에 가까운 포물선을 그리며 코트의 양 끝을 오가는 무시무시한 속도의 공을 눈으로 좇던 아이들의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 차 있었다. 으… 맞기 싫다. 하루카 또한 감춤 없이 떠오르는 아이들의 의사에 무언의 동의를 표했다. 공이 폭탄이라도 된 것처럼 혼비백산으로 피하는 아이들의 사이에 휩쓸려 그녀도 이리저리 몸을 움직였다.
어느새 공이 누군가의 손아귀에 안착한다. 하루카는 공을 쥔 그 아이와 눈이 마주친다. 섬뜩한 눈빛에 재빨리 시선을 피해 봤으나 이미 타깃이 된 후였다. 곁눈으로 피구 공이 하루카의 얼굴 쪽으로 날아오는 것이 보인다.
이대로 맞으면 아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프고, 역시 얼굴에 공을 맞고 싶진 않아. 그렇게 생각하며 재빨리 몸을 틀며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는데,
어?
발이 꼬인다. 몸이 기우뚱하며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차마 몸을 다시 바로 세우지 못하는 얼떨떨한 정신 속에서 하루카는 일단 되는대로 손을 뻗어 바닥과 점점 가까워지는 자신의 몸을 멈췄다.
찌르르, 약한 전기가 통하는 느낌과 함께 손목에 통증이 일었다. 팔을 타고 올라오는 전류 말고도, 살갗에 따끔하고 쓰린 느낌이 섞여 있었다.
까진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바닥과 면이 닿은 손바닥을 뒤집어보자 흙먼지 사이사이로 붉은 기가 미세하게 스며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렇지만 아프다기보단 볼썽사납게 넘어졌을 거라는 생각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른다.
타카시마 괜찮아? 타임, 타임. 아, 방금 공 누가 던졌어 타임이라고. 애가 넘어졌잖아!! 웅성거리는 아이들 속에서 하루카는 그래도 얼굴은 안 박아서 다행이다… 라고 쿵쾅대던 심장을 진정시켰다.
하루!!
그때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겠다는 의지보다 고개가 먼저 돌아간다. 놀란 표정의 우시지마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그녀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인다.
우시지마? 남자애들 아직 경기 중 아냐?
아까 끝났다.
하루카의 옆으로 다가온 우시지마가 급하게 몸을 숙이고 앉는다.
하루, 얼굴이 빨갛다. 많이 다쳤어?
아냐 아냐. 넘어지기 전에 손으로 짚었어.
넘어질 때 손을 짚으면 손목에 무리가 가서 더 심하게 다칠 수도 있다.
나 진짜 괜찮아~
그냥 조금 까진 것 같아. 우시지마는 한참이나 이리저리 손을 살피더니 하루카를 향해 조금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지나치게 가까워진 거리에 그의 머리칼이 살랑이며 볼을 스친다.
와카? 뭐 하는,
문장을 완성할 새도 없이 무릎 뒤로 무언가 불쑥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오금을 단단히 지지하는 그의 두꺼운 팔뚝에 당혹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뜨니 어느새 높아진 고도의 시선 끝엔 허공에 붕 뜬 그녀의 발끝이 담긴다.
양호실에 가야 한다.
아니 내가 걸어갈 수 있는데…!
그 행위에 반 아이들은 물론 경기하고 있던 상대 팀, 심지어는 멀리서 다른 경기를 진행하던 학생들까지, 그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몰렸음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되는 뻔한 일이었다. 넘어졌을 때보다도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숨고 싶어… 바닥을 짚은 손에는 흙먼지가 덕지덕지 묻어있어 얼굴을 가릴 수도 없는데…
하루. 무릎도 까졌다.
그 말에 턱을 당기자, 짧은 반바지 덕에 드러난 무릎 위로 작은 생채기가 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저건 진짜 조그만데…
가자.
우물쭈물하던 그녀에게 반박은 받지 않겠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하는 우시지마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다. 그가 보건실로 가는 동안 하루카는 공중에서 다리를 달랑거리며 쪽팔림을 홀로 감수해야 했다.
드르륵 열린 문의 틈으로 아릿한 소독약 냄새가 비집고 나온다. 정면에 보이는 커다란 창을 가린 새하얀 리넨 커튼이 꼭 거즈를 여러 겹 뭉쳐 놓은 것처럼 바깥의 풍경을 반 정도 투과시키고 있었다. 그 덕에 커튼은 얼룩덜룩한 무늬가 영사되어, 바람에 펄럭일 때마다 그 무늬가 일렁인다. 무늿결이 바뀌기도 전에 목소리가 두 사람을 맞이한다.
누구 왔니?
양호실의 우측에 구비되어있는 간단한 싱크대에서 컵을 씻으시던 양호 선생님이 문이 열렸음을 파악하고선 고개를 돌린다. 그렇게 확인한, 우시지마의 품에 안기다시피 옮겨진 하루카의 모습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다가오는 것이 상당히 놀란 기색이었다. 우시지마는 양호실 침대 위로 하루카를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많이 다쳤니?
손이 까졌습니다.
다리는?
무릎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카의 무릎에 난 생채기는 손가락이 종이에 몇 번 베인 것과 유사했다. 그녀의 무릎을 일별하고선 그게 끝? 이라고 묻는 듯한 양호 선생님의 시선에도 우시지마는 비장할 정도로 당당했다. 하루카가 어색한 웃음으로 분위기를 무마시킨다.
저 소독만 하면 될 것 같아요.
…그래.
이름이… 우시지마 군이었지? 네. 여학생은? 타카시마 하루카요. 그래, 명부는 저쪽에 있으니까, 타카시마가 소독을 할 동안 우시지마 군이 가서 작성하고 오렴. 말을 마친 선생님은 서랍에서 익숙한 갈색 병을 꺼내 든다. 일명 빨간 약이라 불리는 소독약이었다. 조금 따가울 거야, 하고 이어진 따끔함은 그리 심한 편도 아니었으나 하루카는 다른 것의 충격으로 인해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오를 뻔했다.
하루룽!!!
쾅! 하고 젖혀진 미닫이문은 반동에 의해 몇 번이나 벽과 손 사이를 더 퉁퉁거리고서야 완전히 왕복운동을 멈춘다. 보건 선생님이 눈썹을 치켜뜨며 소음의 주체를 살핀다. 하루카도, 명부를 작성하던 우시지마도 선생님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토리?
어떻게 알고 왔어…? 활짝 열린 문 사이로 휘적이며 걸어들어오는 삐쭉 솟은 형체에 보건 선생님은 포기하시겠다는 양 나는 잠깐 나가 있는 게 좋을 것 같지…라며 자리를 뜨셨다. 선생님이 자취를 감춤과 동시에 텐도가 하루카의 곁으로 다가오는 우시지마를 발견한다. 그는 불현듯 떠올랐다는 식으로 하루카에게 와카토시 군이 경기 중에 뛰쳐나가는 거 있지! 라고 그의 행적을 일러바친다.
하루카가 우시지마에게 시선을 던졌다. 경기 끝났었다며. 무언의 일갈에 우시지마가 슬그머니 눈을 피한다. 하루카는 멀거니 허공을 응시하는 우시지마를 내버려 두고 다시 재잘대는 텐도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로 한다.
…그래서 인원수가 안 맞는 김에 나도 애들 눈을 피해서 탈출했어!
너네 그렇게 막무가내로 빠지면 어떡해…
어차피 하루가 생각나서 집중도 못 했을 거야. 대수롭지 않다는 듯 평소처럼 가볍게 날리는 말들은 하루카에게 날아와 안착한다. 자신에게 닿는 말의 홀씨들이 그 속에 숨겨있던 애정을 뿌리내리면 하루카는 마음이 녹아 유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사소하게 다친 건데도 경기 중에 망설임도 없이 뛰쳐나와 준다니. 쑥스러움이 섞인 멋쩍음에 발을 까딱이고 앉아있자니 그 움직임에 반응하여 하루카의 발을 지켜보던 우시지마가 입을 열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열정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을 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그가 슬그머니 까딱이던 발목에서 무릎까지 시선을 굴린다. 이제는 피딱지가 앉아있는 상처를 눈길로 어루만진다. 무형의 것이 닿았으나 괜스레 아물어가는 상처가 다시 따끔거린다.
그야…
다 같이 참여하는 행산데. 나만 늘어져 있을 순 없잖아? 산뜻한 답변이 톡 터진다. 늘 재잘대던 텐도도 놀랐는지 입 대신 눈을 벙긋댄다. 솔직히 하루, 지치면 경기 중에 어디 앉아있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맞다. 너희 둘 나를 어떻게 보는 거야.
멋있네.
그렇군.
뭐야 갑자기…
세 명에 의해 왁자지껄함이 가득 채우던 보건실의 소음이 차차 빠져나간다. 그 빈 자리를 감지하였는지 열린 창의 커튼이 살짝 펄럭이며 낙엽 냄새가 물씬 풍기는 외부의 공기가 보건실로 흘러들어온다. 가을 공기가 스치니 하루카의 얼굴도 가을빛으로 발갛게 물드는 것만 같았다.
소독을 마치고 보건실을 나오니 시간이 제법 흘러있었다. 세세한 경기들이 차츰차츰 잦아들고 하이라이트 격의 이벤트들이 체육대회를 장식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운동장의 트랙을 따러 빙 두르고 앉아, 반별로 준비한 공연을 구경하고 있는 아이들의 사이로 하루카는 조심스레 발을 디딘다. 그녀를 위해 자리를 맡아두었던 아이들이 까치발을 들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는 하루카를 발견한다.
타카시마 괜찮아? 으응. 아니 우시지마 군이 들쳐메고 가길래 놀랐다고!! 그 정돈 아니었는데…. 공연 거의 다 놓쳤잖아. 아쉬워라.
그래도 다행이다.
뭐가?
곧 있으면 계주 시작하잖아.
계주까지 놓쳤으면 정말이지 체육대회에 참가한 의미가 없다고. 하루카는 반 아이들 사이에 끼어 앉아 장애물들이 들어서고 있는 운동장 트랙을 지켜본다.
와카랑 토리는 계주를 나간다 그랬지. 둘 다 운동부라 반 아이들의 등쌀에 떠밀려 출전을 하게 되었다. 우시지마와는 같은 반이라 그 과정을 함께 했고, 텐도는 계주 주자들이 확정된 후 콧잔등을 구겨대며 투덜거렸으니. 그러면서도 거절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하루카는 텐도가 등을 돌린 사이에 몰래 미소를 지었다.
짝수 반과 홀 수반이 갈라서서 총 점수가 합산되는 방식인지라 우시지마와 하루카는 청팀, 텐토는 홀로 홍팀에 배정이 되었다. 각각 파랗고 붉은 바톤을 들고 있는 아이들의 뒤로 대기를 하는 우시지마와 텐도가 보인다. 순서를 보니 우시지마는 두 번째, 텐도는 마지막 주자인 것 같다.
와카!! 토리!! 힘내!!
목소리를 높인 만큼 손도 들어 올려 흔들자 두 남자가 뒤를 돌며 반응한다. 묵묵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살짝 웃으며 손을 마주 흔드는 우시지마와 팔 전체를 붕붕 젓는 텐도.
탕!!
총소리에 이어 첫 주자들이 걸음을 던진다.
진짜 빠르다, 육상부라 해도 믿겠어. 그러게. 주자들의 움직임은 잠깐 고개를 돌리기라도 하면 눈으로 따라잡기 힘들 정도였다. 첫 번째 장애물 구간이었던 허들은 높이가 꽤 있어 보였으나 그 누구의 발치에도 걸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첫 타자들의 바톤이 대기 중인 두 번째 주자들에게로 넘겨진다.
우시지마!!!!!
하루카가 속해있던 3번의 아이들이 목청이 그 위력을 선보인다. 원래도 유명했던 이름은 유스 선발이라는 이벤트에 힘을 얻어, 교내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드물었다. 3반뿐만 아니라 다른 홀수 반들도 그의 이름을 연호하자 운동장이 과열된다.
두 번째 주자들에게 주어진 미션은 높은 봉에 달린 빵을 뜯어 먹는 것이었으나,
키 진짜 크다…
배구부원들 중에서도 키가 큰 편에 속해있던 우시지마는 그리 힘을 들이지도 않은 점프 하나만으로 빵을 손쉽게 입으로 낚아챘다. 우직한 이미지에 가깝던 우시지마가 스파이크고 아니고 단순 허공에 달린 빵을 먹기 위해 몸을 날렸다는 기행은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다른 트랙의 주자들도 만만치 않은 상대들이었다. 거의 동시에 세 번째 주자가 첫걸음을 내디뎠으나, 우시지마가 조금 더 빠른 속도로 바톤을 넘긴다. 그러나 이어진 달리기에서 바닥에 설치된 그물망을 꾸물대며 기어 나온 첫 아이는 2반이었다. 하루카는 재빨리 다음 타자를 살폈다. 2반이면 토리네 반이잖아. 아니나 다를까, 텐도가 기다란 팔로 바톤을 받아든다.
사토링 달려!!
타카시마. 텐도 군은 다른 팀이거든?
옆에서의 장난스러운 일갈에 하루카는 눈웃음으로 답하며 텐도를 응원했다. 마지막 주자들의 경로엔 안쪽 면이 보이지 않도록 접힌 쪽지들이 테이블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일명 손님 모셔오기. 쪽지에 적힌 내용에 해당하는 사람을 데리고 계주를 완주해야 한다.
어, 쪽지 들어 올렸다.
긴 다리로 징검다리를 건너듯 껑충 뛰어, 제일 먼저 하얀 쪽지들이 널려있는 곳에 도착한 텐도는 발을 뻗기가 무섭게 팔도 뻗어 쪽지를 낚아챈다. 그러고선 고개를 팩 돌려 한 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온다. 맞다. 걸어왔다.
하루!
어?
하루카의 앞으로 훌쩍 다가온 텐도가 그녀의 손을 잡는다.
같이 가줘!
싫어. 우리 하루카 못 줘. 옆에서 허리를 붙드는 같은 반 여학우에, 팔을 당겨오는 텐도에, 하루카는 상체를 앞으로 반 정도 굽힌 어정쩡한 자세가 되었다.
저기 얘들아…
그 사이에 쪽지에 도달한 다른 아이들도 두리번거리며 상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이러다 지겠다. 텐도 군은 져야 해. 거 너무하네!! 금방 갔다 올게 금방..!! 겨우 허리를 감싼 팔을 떼어낸 하루카는 텐도의 손에 이끌려 트랙 위로 나섰다.
함께 달리고 있자니, 평소에는 넓은 편에 속했던 텐도의 보폭은 뜀박질을 하고 있음에도 따라잡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걸음… 맞춰주는 건가? 덕분에 숨을 몰아쉬지 않아도 옆을 지킬 수 있던 하루카는 슬쩍 물음을 건넨다.
쪽지 내용 뭐였어?
비밀~
뭐야 궁금하잖아. 뺏어갈 수 있음 뺏어가 봐, 입꼬리를 올리며 샐쭉 웃는 텐도가 달리면서 팔을 한껏 들어 올리니 하루카의 손이 닿을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뭐야, 사토링. 내가 친히 반을 배신하고 너를 위해 나와줬는데. 그건 고맙게 생각한다구? 투덕거리다 보니 어느새 완주를 알리는 리본이 눈앞에서 툭, 끊어진다. 와아아!! 함성과 함께 짝수 반 아이들이 자리에서 기립한다. 텐도!! 사토리!! 울리는 외침들 속으로 뛰어 들어갈 법했음에도 텐도는 하루카의 곁을 지킨다.
나 변절자가 되어버렸어.
소음 속에서 나직이 말하는 속삭임에 응하려는 듯 하루카의 귓바퀴를 텐도가 자신의 손으로 덮는다. 그러고선 중대한 비밀이라도 알려주는 것처럼 굴더니 툭, 무언가가 끊기는 소리와 함께 등 위로 물결치는 무게감이 느껴진다.
토리!!
푸흐, 종일 머리 묶고 있었더니 자국 제대로 남았네!!
텐도.
묵직한 목소리와 함께 텐도에게 뺏긴 머리끈이 어디론가 쏙 빠져나가 버린다. 우시지마가 텐도의 뒤에 서서 그가 쥐고 있던 머리끈을 회수한다. 뭐야, 와카토시군. 흑기사야? 불퉁하게 묻는 텐도의 말에도 우시지마는 반절은 묶이고 반절은 구불거리는 하루카의 머리만을 바라본다.
…내가 머리는 잘 못 묶는다.
머리끈이 우시지마의 손과 함께 하루카의 손에 얹힌다. 그에 하루카가 웃으며 겹쳐진 손을 꽉 쥐어 깍지를 끼운다. 반대쪽도 풀면 되는 거지, 그러고선 살짝 고개를 틀자 우시지마가 잡히지 않은 손으로 그녀의 머리끈을 조심스럽게 빼낸다.
살랑, 검은 물결이 우시지마의 손을 타고 흘러내린다. 우시지마는 손을 잡은 채로 말한다.
오늘, 신선한 모습을 많이 보는 것 같다.
단정하게 묶고 다니던 머리칼이 온통 헝클어져서 그런가. 그러고 보니 체육대회가 시작하기 전에 내 머리도 엉망이었는데.
혹시… 그래서 싫어?
좋다.
즉각적인 대답에 하루카는 말간 웃음을 비춘다. 그럼 앞으로도 많이 보여줄 테니까, 계속 같이 있어 줘야 해. 당연하다. 토링, 우리 이제 정리하러 가자. 그래~!
밝게 대답을 하고서 둘을 따라가는 텐도는 주머니에 숨긴 쪽지를 더 깊숙하게 밀어 넣는다.
좋아하는 사람.
아직,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니까. 혀끝에 버석거림이 감돈다. 건조해진 구강은 계속 다물고 있으면 금방 체액으로 차올라 습해질 것이다. 하여 그는 멀어지는 둘 쪽을 향하여 걸음을 길게 디뎠다. 그렇게 셋은 함께 아이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향했다.
21.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