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썸네일 신배 님 커미션
#우시하루
"와카는 그렇게 안 보이지만. 주변 사람들 생각도 엄청 하고, 엄청 잘 챙기지~"
다른 친구들도 네 다정한 점을 알아주면 좋겠다, 와카 네가 조금 더 어필을 해봐! 그렇게 마무리가 된 하루카의 말에 일단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완전 무시하고 있지? 하고 이어진 말은 넘겨들으며 하루카의 말을 다시 곱씹어 보았다. 그 조그마한 입에서 나온 단어들은 어떻게 생각해도 나와는 안 어울리는 단어였다.
나는 주변 사람을 잘 챙기는 편이 아니고, 다정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하루카는, 내가 하루카에게 하는 행동을 다른 사람에게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싶었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사실을 말하는 것은 쉽고, 아마 하루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착각을 했다면 그렇게 말했을 터였다. 아아, 나는 하루카에게 이런 식의 말을 해준 적은 없다. 하루카가 생각하는 '와카'의 이미지가 그런 좋은 쪽의 이미지라면, 그것을 내가 굳이 고쳐줘야 하는가?
그럴 리가.
하루카가 나를 '다정하고 아무튼 착한 녀석.' 정도로 생각하기 시작한 건 최근일 것이다. 어렸을 땐 감정을 표현하는 법이 서툴렀으니, 아마 그렇겠지.
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마저 너에게서 배웠었다.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된 건 당연한 이치와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관계의 시작을 자세히 알기 위해선 꽤 옛날로 되돌아가야 한다. 어린 시절, 타카시마 하루카를 처음 만났던 그 날로. 내가 기억하는 너의 처음은 타카시마 씨의 뒤로 몸을 숨긴 채 나를 빤히 쳐다보는 모습이다.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눈동자엔 여러 가지 감정이 떠올라 있었고, 그 감정은 어린 내가 느끼기에도 긍정적이고 따뜻한 것들뿐이었다. 너도, 나도 또래 아이를 마주하는 건 서로가 처음이어서 친해지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는데, 아마 내 탓이 크겠지. 네가 말을 걸어주거나 관심사를 알아내기 위해 질문하여도 나는 그 무엇하나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았었다. 전하지도 못 할 변명이긴 하지만, 어떤 대답을 돌려주어야 할지 몰랐었다.
답답했을 법도 한데, 그럼에도 떠나지 않고 계속 손을 내밀어준 네 모습에 나는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었다. 네가 놀러 올 때마다 해준 재미있는 이야기도, 나에게 주고 싶어 손에 꾹 쥐고 온 녹아버린 아이스크림도. 네가 나에게 준 다정함 전부가 분에 넘치고도 남는 선물이었어. 이 고마움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싶어서, 그때부터 너를 관찰하면서 표현하는 법을 익혔던 것 같다. 여전히 서툴고 속을 알 수 없는 내 모습이 너는 오히려 편했던 걸까. 네 여러 가지 일상을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공유해주곤 했는데, 가끔 내가 반응을 해주었을 때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 기쁜 듯이 웃어주어서. 결국 나도 마주 보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어린아이 특유의 반짝임은 주변 사람에게 큰 영향을 주는 걸 알고 있다. 또한 많은 아이들이 그 반짝임을 가지고 있는 것도. 대체 무슨 말이냐 하면, 오직 하루카만이 그 따뜻함과 빛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걸 커가면서 알았다는 뜻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나는 운이 정말 좋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이런 가정은 상상도 하기 싫지만. 사실 나에게 있어서 너는, 이대로 좋은 추억으로. 어렸을 적 잠깐의 풋사랑으로 남을 수도 있었다.
내 주변엔 좋은 사람이 많았는데, 아마도 내가 좋은 환경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겠지. 시라토리자와 중학교에 입학해 내가 원하는 강한 환경에서 강한 배구를 배워갈 수 있었고, 그곳에 하루카 너는 없었다. 우리는 다른 현이었기에 학교를 재학하기 시작한 이후로 만나는 시간이 현격히 줄어들었고, 내 훈련 시간이 늘어나면서 내 쪽에서 너를 찾아가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하지만 너는 항상 그 시절 그대로 변함없이 나를 생각해주어서. 그 모습에 내 마음도 따라서 변하지 않았나 보다.
하루카는 감히 내가 예상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매번 내 상상을 뛰어넘곤 한다. 내가 너에게 가지 않으니 네가 나에게 와주곤 했는데, 이유가 뭔지 물으면 '와카토시가 생각났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른 짐 없이 항상 들고 다니는 작은 수첩 하나만 달랑 들고 집에 놀러 오던 하루카는 한밤을 묵을 땐 갈아입을 옷이 없다며 너에겐 헐렁할 내 반팔티를 빌려 입고, 밤새 자신이 적은 가사를 나에게 설명해주었다. 언젠가 나를 위한 곡을 쓰고 싶다고 얘기했었지. 그 말을 듣고 나서 나는 배구를 하지 않을 때에도 심장이 뛰는 소리가 이렇게나 크게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너는 이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을까? 아마 내가 알고 있는 너라면, 기억해주고 있을 것이다.
놀이 상대라곤 서로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이 지나가고 많은 인연과 새로운 환경이 너를 맞이했지만. 선천적으로 다정하고 무른 너는 나를 잊지 않고 찾아왔으니. 언젠가 내가 까먹더라도 네가 기억해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다.
"하루."
"응? 불렀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돌아보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하루카는 아주 조그맣다는 느낌을 주는데, 아마 그 행동거지 자체가 폭이 좁고 작기 때문일 것이다. 잠긴 목소리로 대답한 뒤 나를 돌아본 하루카에게 먹기 좋게 잘린 수박을 건네자 "고마워."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작업실에 들어온 내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으면 하루카는 자연스럽게 침대 옆에서 방석을 꺼내 나에게 던진다. "바닥 차갑잖아." 핀잔을 주는 것도 잊지 않고. 멋대로 자리를 잡고 작업하는 네 뒷모습을 구경하는 건 이제 익숙해졌나 보다.
이제는 서로의 집이 바로 옆이기 때문에 방학이 되면 틈 날 때마다 하루카를 보러 오곤 한다. 그때마다 너는 이렇게 작업을 하고 있어서, 네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게 어느새 습관이 되어버렸다. 방 안에서 가동되고 있는 에어컨 덕분에 여름임에도 서늘하다며 내려 푼 머리카락이 그 바람에 작게 흔들리는 것을 멍하니 구경하다 문득 최근에 텐도가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하루룽 말이야~ 집중하고 있을 땐, 몇 번이나 불러도 대답을 잘 안 해주지~'
이 사실은 텐도가 나에게 말 해줬을 때 처음 알았다.
"하루."
"웅. 왜?"
내가 이름을 부르면 하루카는 무슨 일을 하고 있든 나를 돌아봐 주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작사에 집중하던 도중이었지만 흔쾌히 대답히 돌아오지 않았나. 이 사실은 머리가 아파올 정도로 내 기분을 좋게 만든다.
"지금은 무슨 곡을 만들고 있는 거지?"
"곡이라니...! 아직 그냥, 가사만 쓰는 거야!"
"그게 그거 아닌가?"
"당연히 아니지... 아무튼. 왜? 궁금해?"
"응. 네가 쓰는 거니까."
"말은 참 예쁘게 하지요. 이리 와서 봐도 돼."
허락이 떨어져 몸을 일으킨 뒤 하루카에게 다가갔다. 펼쳐진 공책 위엔 여러 가지 단어가 어지럽게 적혀져 있었는데, 그중 '평생의 반려'라는 단어가 눈에 밟혔다. 평생의 반려, 부부를 뜻하는 단어일 것이다. 하루카만 허락해준다면 우리도 평생의 반려가 될 터였다. 이 단어처럼 결혼이 하루카를 곁에 평생 묶어두는 편리한 것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부부', '평생의 반려', '결혼' 등은 하루카의 마음을 붙잡는 데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가, 나에게 있어서도 우리의 '약혼' 이야기는 참으로 우스웠다. 그저 말뿐이었던 약혼, 이것은 시작조차 우리를 놀리기 위해 만들어진 거짓말이다.
아, '약혼한 사이다.' 라는 내 말이 전교에 소문으로 퍼지고 나서 교실이든 체육관이든 기숙사든, 우리 둘을 놀리 거나 사귀는 게 확실하다는 취급이 꼬리표처럼 따라 붙었다. 아마 내가 확실히 정정했다면 초반에 바로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지만. 솔직히 털어놓자면 네가 약혼이란 단어를 듣고 잠깐이라도 나를 의식했으면 했고, 이 소문으로 인해 우리의 가까운 사이가 알려져서 다른 사람이 널 좋아하지도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이런 나에게 진심으로 친절이나 다정이라는 수식을 붙여주는 사람은 한평생 너밖에 없을 것이다.
그건 네가 친절하고 다정해서 임에도 스스로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안타깝다. 네가 생각하는 만큼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고, 아마 네 마음속 나처럼 좋은 사람이 되려면 나는 평생을 노력해야 하겠지. 하지만, 그래, 네가 원한다면 나는 그런 사람인 척이라도 할 것이다. 내가 네 기준에 충족하는 사람일 동안 곁에 있어만 준다면, 그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나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건, 네 마음을 붙잡아두는 것이니.
21.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