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14

 

* 썸네일 장마눌 님 커미션

#텐하루au  

 


 

 

"이거 진짜 맛대가리 없어."

"..."

맛없다기 보다는, '맛'이 없는 거지만.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는 말장난을 치며 탐사 로봇 H18110-ta94는 언제쯤 상위에서 그들에게 미각 센서를 달아줄지 가늠했다. 아마 그가 망가질 때까지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H18110-ta94와 그의 탐사 파트너 W13081-us94는 배분 된 에너지 보충 시간에 맞춰 '식사'를 한 뒤, 동시에 16시 30분에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 일정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번 찔끔찔끔 충전하는 거 귀찮아. 우리도 3세대 처럼 자동 충전 기능 달아주면 안되나? H18110-ta94의 투덜거림은 항상 있는 일이었기에 W13081-us94는 크게 개의치 않고 대답 또한 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기준을 세워 정말 필요한 때가 아니라면 굳이 반응을 해주지 않았는데. H18110-ta94는 그 점이 조금 불만인듯 싶었지만 그 역시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이 잦아 대답을 강요하진 않았다. 그런 행동 자체가 불필요하기도 하고.

위잉. 익숙한 소음이 H18110-ta94의 청각 센서에 닿았다. 으음, 오늘은 조금 멀리 나가야 하네. 이 구역까지 가는 건 조금 귀찮은데. 구역 탐사는 하루 일정의 4분의 3이나 차지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탐사 행위 자체를 지루해했다. 어쩌면 하루종일 탐사만 하는 거니 당연한 건가? 그래도 가끔은 예전에 인간이 쓰던 물품을 발견하곤 하는데, 그럴때마다 가슴이 벅차곤 했다. (인간은 기쁨이란 감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오늘은 뭔가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큰 성과를 올리면 상위에서 내 요구를 들어줄 수도 있으니까. 당연히 미각 센서를 말하는 것이다. 음 그러면 후각 센서도 같이 달아주려나?

소형 탐사 로봇인 H18110-ta94는 최대 4~ 500kg 정도 밖에 옮기지 못한다. 애초에 그렇게 설계 된 몸뚱아리라 어쩔 수가 없다. 대신 좁은 공간엔 잘 들어가니 괜찮은 건가? 파트너인 대형 탐사 로봇 W13081-us94는 확실히 부피가 크긴 하지. 그래서 탐사 파트너는 기본적으로 소형-대형 구조로 붙여주는데... 그들의 경우엔 H18110-ta94의 요구로 인해 개별적으로 탐사를 다니고 있다. 이 주변은 청소가 거의 완료되었기에 무거운 물체는 더이상 남아있지 않으니 따로 다니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냐, 는 그의 주장을 W13081-us94가 받아들여주었기 때문에.

그래서 지금 H18110-ta94는 곤란에 처해있다. 탐지 센서가 감지한 거대한 지하 구조물을 보고 '가슴이 벅찬' 것도 잠시, 가까이 가보니 구조물의 입구를 뜯어내기엔 그의 악력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여러번 계산을 해보아도 역시 그가 뜯어내는 건 불가능해서 결국 혼자서 들어가는 것은 포기하고 W13081-us94에게 연락을 넣기 직전이었다. 그의 탐지 센서가 구조물 안으로 연결되어 있는 조그마한 개구멍이 87.7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해있는 걸 잡아냈다. H18110-ta94는 바로 연락하던 걸 멈추고 그곳으로 향했다.

이 정도면 W13081-us94도 들어갈 수 있겠는데?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걸 꾹 참고, (인간은 신남이란 감정을 이렇게 표현한다) H18110-ta94는 거대 구조물 안으로 향했다. 약간은 물렁한 흙바닥을 기어가며 그는 이 땅굴이 얼마전에 사용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주변엔 소동물 같은 작은 생명체조차 탐지 된 적이 없었기에 분명 그럴 일은 없어야 함에도, 안쪽으로 향하면 향할 수록 점점 그 예상은 확신으로 변해갔다. 청각 센서에 잡히는 H18110-ta94의 것이 아닌 콧노래 소리가 그걸 증명했다.

조심조심 구조물 안으로 발을 디딘 H18110-ta94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폭발물 없음, 방전될 위험 0.52%, 구조물이 무너질 가능성 또한 없음. 그리고 생명체 반응... 하나. 그가 감지한 결과처럼 구조물은 참 안전하고 아늑해보였다. '아늑하다'는 H18110-ta94로선 아직 잘 이해한 개념은 아니었지만 옛날 문헌에서 대충 이런 구조라고 했던 것 같다. 조금 좁고, 여러가지 물체를 규칙없이 아무렇게나 배치해두며. '사람'이 지내는 듯한 그런.

아 책이다. 종이책.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본 서버의 데이터 베이스에서 가지고 있는 권한에 한해 갖가지 정보를 받아볼 수 있던 H18110-ta94와는 다르게, 인간들은 종이책을 참 좋아했다. 종이책이 사라진 건 200년도 더 되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뭘까. 모른다고 하기엔 책장에 이리저리 꽂혀있는 모양이 참 책 같았다. 하긴... 250년 전에 모두 자연으로 돌아갔다고 했던 '인간' 또한 이곳에 있는데 뭐, 아직 보진 못했지만. H18110-ta94는 지금, 어쩌면 평생을 고대했던 '역사 속으로 사라진 걸 한번쯤 마주하기' 목표를 이루기 직전임에도 왜인지 모르게 자꾸만 머뭇거리고 있었다. 아. 이런 감정을 표현할 단어를 알고 있었는데 무엇이었을까.

평소보다 배는 느릿하게 행동하며 H18110-ta94는 더더욱 안쪽으로 향했다. 중간에 책도 한번 꺼냈다가 조심히 넣어두고, 바닥에 떨어진 흰 티셔츠를 주워 옆 책상에 올려두기도 했다. 물론 정보 분석도 했고. 아직 시각 센서에 담진 못했지만 대략 190cm의 신장을 가진(H18110-ta94보다 거대하다. W13081-us94와는 비슷하겠군) 마른 체형의 허약한 인간인듯 했다. 이곳저곳 부딪힌 흔적이 있으니 그렇겠지. 덤으로 뒷정리를 잘 안 하는 성격인가 보다. W13081-us94가 보면 입을 열고 잔소리를 할지도. 쓸데 없이 에너지를 낭비하며 다다른 끝엔 고동색 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원하던 순간인데 왜 이 문을 열기가 싫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열지 않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기에 H18110-ta94는 주저 없이 문을 열었다.

"응? 이상하다? 문 제대로 닫아놨는... 데."

"아."

인간이다. 자신의 공간에 칩입한 H18110-ta94를 보고 눈을 크게 뜨던 인간은, 곧이어 조용히 눈물만을 흘리기 시작했다. 인간이 소리를 지를 거라 예상했던 H18110-ta94는 미리 꺼놓은 청각 센서를 다시 복구한 뒤 인간이 어떤 행동을 취할지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가만히 있는 게 아닌 다른 행동은... 우는 인간을 보자 든 이유 모를 감정덕에 과부화가 걸려 할 수가 없었기에. 소리 없이 서럽게 울던 인간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아 36분 정도는 더 울기만 했다. 울다가, H18110-ta94를 올려다 보고. 다시 울었다. 그것의 반복이었다.

그러다 미동도 없이 움직이지 않는 H18110-ta94가 이상했는지 다시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인간은, 작은 탄식과 함께 드디어 입을 열었다.

"당신 인간이 아니지?"

"그렇습니다."

"그래. 아니, 아냐... 왜. 왜 아닌데? 그럼 넌 뭐야. 뭐. 로봇이라도 돼?"

"1세대 소형 탐사 로봇, 기종명 H18110-ta94 입니다. 설명이 되었나요?"

"좀 닥쳐봐."

놀랐다가 곧바로 울었고. 그러다 절망했으며, 방금은 그에게 화를 냈다. H18110-ta94는 이 짧은 순간에 변화한 인간의 다채로운 심경의 변화가 너무나 신기해 웃고 싶은 걸 꾹 참아야 했다. 화를 내는 인간 앞에서 그가 웃으면 인간이 그를 쫒아낼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 상위로 넘겨야만 하잖아. 이건, 조금 더 지켜보고 싶었다. 인간의 변칙적인 행동은 데이터로 읽는 것보다 직접 보는게 훨씬 흥미롭구나. 인간은 아직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건 명령문 인가요?"

"어. 좀 조용히하라고. 제발."

"그런 뜻이군. 알았습니다."

"잠깐, 명령문? 질문한 거야...? 명령이냐고 하는 건줄 알았는데..."

"제가 왜 인간의 명령을 따릅니까?"

"말투도 묘하게 이상하네."

"저와 대화하는데 왜 혼잣말을 하나요?"

"잠, 잠깐만. 생각 정리 중이니까. 일단 닥쳐보라고."

"싫은데요."

거참 말 안 듣는 로봇이네. 부터 대화를 제대로 하기 시작한 인간은 H18110-ta94가 '인간'같이 행동하고 말하자 그를 편하게 인식했는지 자츰 많은 것을 이야기 해주었고, H18110-ta94 또한 여러가지를 이야기 해주었다. 지금은 인간이 사라진지 꽤 되었으며(정확한 햇수는 말해주지 않았다) 스스로 사고하는 인공지능 로봇 중 통솔 능력을 가진 '상위'가 0세대 로봇들과 함께 지금까지 1세대, 2세대, 3세대를 생산해 인간이 없는 지구를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 등을. 인간은 지친듯한 눈빛으로 고개만 끄덕였으며 곧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신을 '텐도 사토리'라고 소개한 인간은 눈을 뜨고 난 이후로 지금까지 혼자였기에 아주 외로웠으며 혼잣말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자신이 캡슐에 들어갈 때만 해도(이 구조물에 있던 구형 냉각 시스템을 말하는듯 하다) 인간이 알던 로봇은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고 단순한 명령만 수행했기에 H18110-ta94가 조금 신기하다고도 했다. 사실 머리 옆의 불빛만 아니었어도 아마 로봇인 것을 몰랐을 거라고. 대략 400년 전을 살았던 인간일까.

인간은 자신에게 메세지만 남겨두고 구조물에서 사라진 동료들을 원망하고 있다고도 했다. 이건 의외의 사실이었기에 H18110-ta94는 기억해 두기로 하고 조금 더 내용을 물어보았다. 약간 머뭇거리던 인간은, 곧 H18110-ta94 말고는 털어놓을 곳도 해결할 방법도 없는 걸 깨닫고 그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으며 도움을 요청했다. 메세지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사토리, 네가 이걸 들을 땐. 아마 우리 전부가 캡슐에 없을 거야. 년도를 알아보니 지금은 우리가 캡슐에 들어간지 정확히 100년 뒤가 맞는 것 같은데 네 캡슐에만 오류가 생긴듯 보이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있겠지만 여러가지로 지금은 너무 바빠... 널 빼내기 전까지 메세지를 계속 남겨놓을게. 빼내면 모두 지울 거고. 다음 메세지는 음... 'ncaW41u0BwP;7-vm' 기계음 소리가 좀 시끄럽네. (무언가 깨지는 소리) 이런, 하야토가 사고를... 그럼. ]

인간은 저 값이 무엇인지 감도 잡지 못해 13일 간 헛수고만 했다는 사족도 붙였다. 값을 메모리에 기억해둔 H18110-ta94는 인간에게 그가 오늘 세터로 돌아가면 한번 해석해 보겠다고 선뜻 약속을 했다. 그에게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기도 했고, 이렇게 하면 인간이 기뻐할 것 같았어서. 역시나 인간은 뛸 듯이 기뻐했고 H18110-ta94의 손을 꽉 잡으며 고맙다고 했다. 덤으로 로봇양은 참 차갑구나, 라고도 했는데 H18110-ta94 같은 1세대 로봇들은 온도를 감지할 수 없었기에 그저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인간에게 그가 차갑다면 H18110-ta94에게 인간은 따뜻할까?

인간이 연구원이었던 시절 이야기를 듣던 중간에 H18110-ta94는 곧 에너지 보충 일정이 다가옴을 눈치챘다. 한번도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낀 적이 없었는데, 그것은 참 신기한 감각이었다. 그가 인간에게 이만 가보겠다고 말하자 인간이 아쉬워하는 기색을 내비쳤고. H18110-ta94는 짧은 시간에 그에게 적응한 인간이 유별나다고 생각했다. 아니, 인공지능 로봇 말고는 달리 의지할 곳이 없는 인간이 불쌍한 건가.

"로봇양~ 잘 가~! 올 때 값 해석 잊지 말고!"

H18110-ta94가 말렸지만 끝까지 따라나와 그를 배웅하는 인간을 보며 H18110-ta94는 어서 다음 탐사시간이 오길 바랐다. 인간의 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기 때문에. 인간들 끼리 쌓아온 그들만의 형형색색의 추억이 너무나 신기하고 재밌어서. 정해진 루틴이 아닌 저들끼리 앞으로의 시간을 만들어 나가는 게. H18110-ta94가 본 어떤 데이터나 정보보다 값지게 느껴졌다.

 


 

"1308, 만약 살아있는 인간을 발견하게 되면 그 인간은 어떻게 될까?"

"상위가 있는 본 세터로 운송되겠지."

"역시 그렇겠지~"

"그 질문의 의도는?"

"그냥."

W13081-us94는 딱히 납득한 것 같이 보이진 않았지만, H18110-ta94가 그런 걸 신경 쓸 상황은 아니었다. 7시간의 길었던 에너지 보충이 끝나고 2시간의 자유 행동 시간 끝에. 드디어 다시 탐사 시간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2시간 동안, 아니 사실 1.52초 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어쨌든. 인간이 부탁한 값의 해석도 끝났고 다시 그곳으로 향하기만 하면 됐다. 오늘 탐사 구역은 그곳이 아니지만 H18110-ta94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니었다. 1세대와 2세대 탐사 로봇에겐 위치 추적 기능이 따로 달려있지 않았으며, 정해진 시간에 돌아오지 않는 탐사 로봇은 그대로 제적 처리가 된다. H18110-ta94의 행동이 시시각각 세터로 전해지는 것도 아니고 보고를 하지 않으면 상위는 인간에 대해 알 길도 없다. 전부 다 로봇임에도 인간이길 고집한 상위들 덕분이지.

오늘은 꼭 인간에게 '에이타 군'과 방울토마토를 키웠다가 장렬하게 실패한 이야기를 마저 들을 것이다. H18110-ta94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동 자차의 속도를 평소보다 조금 더 높였다.

H18110-ta94는 어제 자신이 열지 못했던 닫혀버린 구조물의 입구를 지나치며, 나중에 1308한테 뜯어달라고 할까. 하는 심심한 생각을 했다. 물론 그랬다간 인간은 센터로 운송될 테지만.

오늘은 인간과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까? 아마 인간은 암호의 해독부터 궁금해하겠지. 하지만 어제 못다 한 얘기를 먼저 들어야겠다. 인간과 가까워질 수록 잡생각이 많아졌지만 H18110-ta94는 그리 개의치 않고 '아늑한' 그의 쉼터로 향했다. 개구멍을 기고, 나와서는 흙을 털고. 여느 책에서 본 평범한 가정집에 사는 인간을 따라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H18110-ta94는 현재 살아있는 인간을 찾아 거실로 향했다.

"와, 실화였네. 꿈이거나 미쳐버린 건 줄 알았는데."

"그렇다면 상상력이 좋으신 편이었겠네요."

"그런 건 또 아니지만~"

밝게 웃으며 말을 걸어오는 인간을 보면서 H18110-ta94는 안심했다. 사라지지 않고, 멀쩡히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그러면 저기 로봇양~ 나 어제 부탁한..."

"어제 못다 한 토마토이야기. 더 해주세요."

"으음, 음~... 아 정말! 로봇양은 못 당하겠다니까."

약간의 충족감을 느끼며 H18110-ta94는 인간의 옆에 앉았다. 인간도 무지 심심했었다고 했으니 아마 지금 이렇게 이야기 해주는 게 '행복'하고 '기쁘지' 않을까? 그동안 얻은 정보로 인간의 기분을 예상해봤지만 그런 정보보다, 당장 눈앞에 있는 인간의 표정이 무척 안심한 것 처럼 보여서... H18110-ta94는 인간을 예측하는데 있어 데이터 따위는 도움이 되지 않는구나. 하는 1308이 들으면 '잘 못 들었다.'라고 할 만한 생각을 했다.

"그래서 세미세미가 결국 대표로 레온 군에게 혼났었지~"

"당신은 혼나지 않았나요?"

"당연하지! 이~렇게 무서운 표정으로 에이타 군에게 '물귀신 작전을 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하고 눈으로 말해줬거든."

"그렇다면... 그 인간은 당신을 무서워 한 건가요?"

"응? 아냐아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에이타 군이, 착해서. 대신 혼나준 거지... 단체로 혼나기 보다 혼자 혼나면... 더 빨리 분위기가 풀리니깐..."

 

"그 시절이 다시 생각나셔서 괴롭나요? 목소리가 또 작아지고 있어요."

"아 로봇양 정말~! 그런 말을 하면 내 감성이 다 날아간단 말이지?"

"죄송합니다... 그러면 그 인간도 그 인간에게 위협을 가한 건가요?"

"잠깐잠깐! '그 인간', '그 인간' 거리면 누가 누군지 헷갈리잖아? 이름으로 말해줘."

"하야토 군도 에이타 군에게 위협을 가한 건가요?"

"으햐하, 아니~ 하야토 군은 그럴 인물은 아니지~"

"그렇군요.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로 못된 사람이네요."

"너무해~ 결론이 그렇게 나는 거야? 게다가 로봇양, 난 이름으로 안 불러주네."

이름? 텐도 사토리라는 그 이름 말인가. 확실히 기억은 하고 있지만... H18110-ta94가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홀로 남은 인간은 조용히 그 고갯짓을 바라보다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이름으로 불러주기 싫어? 나는~ 우리 로봇양을 위해 무려 멋진 이름도 생각해놨는데 말이야! 그냥 '로봇양'은 너무 딱딱하잖아. 기종명은 너무 길고! 인간의 높고 빠른 목소리가 H18110-ta94의 청각 센서에 맴돌았다. 한참 뒤에야, H18110-ta94는 인간에게 대답을 해줄 수 있었다.

"저를 위해 이름을 생각하셨다고요?"

"응! 바로 그 말~! 어때? 감동적이고 막 그래?"

"네. 감동적입니다."

"그렇게 영혼없이 말하면... 듣는 사람이 다 힘 빠진다구?"

"죄송합니다."

"됐네요~ 두구두구... H 어쩌고 로봇양을 위한 이름은~ 바로 '하루'!"

"하루... 요."

"마음에 들어, 하루?"

완전 잘 지은 것 같아~! 하는 인간의 말을 뒤로하고 '하루'는 인간이 직접 지어 준 하잘 것 없는 이름을, 평생 잊지 않기 위해 몸체의 깊고 깊은 곳까지 그 이름을 박아넣었다. 이미 기종명이 있는 로봇인 나에게 인간의 이름을 붙여주다니. 참 인간다운 생각이었다. 그런 인간다움이 하루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 

하루는 이름을 받은 뒤, 곧바로 인간에게 자신이 해석한 암호를 알려주었다. 간이 밭이 있는 온실 구역의 세 번 째 줄, 다섯 번째 칸. 바로 그 밑.

와... 평생 이곳을 뒤져봐도 몰랐겠다. 인간은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하루를 데리고 해당 구역으로 향했다. 그곳엔 하루의 암호 해석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400년 전의 녹음기가 흙 밑에 묻혀있었다. 인간은 지체하지 않고 그곳에서 바로 녹음기를 재생시켰다.

[ (치직거리는 노이즈가 심하다) ...그래서 지금은 (잘 들리지 않는다) ...마지막 녹음기야. (소음) ...하지? 아무튼 왜 이걸 나에게 녹음하라고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너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떻게 보면 네가 배신감을 느낄 것 같아서. ...사실 널 버린 거니까 배신감 느끼는 게 정상이지만. 미안해. (뒤에서 작게 들리는 다른 목소리) 나중에 캡슐 나와서 복수하겠다고 하는 거 아니야? (다시 처음의 목소리) 하하... 그럴 지도. 나는 그 복수 달게 받아줄게. (뒤에서 큰 목소리) 하야토! 그거 붙잡고 있을 때 아니야. 빨리 끝내! (처음의 목소리) 알았다고!! 진짜... 여기까지야 사토리. 미안, 잘 자. ]

하루는 녹음기를 붙잡고 우두커니 서 있는 인간을 바라보았다. 충격받았나? 녹음기의 목소리가 말한 것 처럼 배신감을 느끼고 있나? 어쩌면 화가 났을 지도 모르겠다. 배신이란 무릇 그런 거니까. 하루가 입을 떼기 직전, 전달이 다 끝난 줄 알았던 녹음기에서 아까와 같은 목소리가 훨씬 작은 크기로 흘러나왔다.

[ ... ...사토리, 들려? 'cmz1kUU09-vnx12' 꼭 찾아가봐. 전의 암호랑 같은 패턴이야. 갑작스럽게 마지막 전달이 되어버렸으니까. 내가 몰래 두는 거야. 그럼... 진짜 안녕. ]

하야토 군이라는 인간은. 홀로 남은 인간과 정말 아주 친했던 걸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눈앞의 인간은 다른 인간들에게 버려졌다. 음. 그 상황에 죄책감을 느낀 하야토 군이 그것을 덜기 위해 이런 짓을 한 걸지도 모르고. 이유가 무엇이든 지금 인간은 무지 분노할 것이다. 혹은 아주 큰 슬픔에 빠지거나. 믿던 인간들에게 배신 당한다면 응당 그러지 않을까.

"하루."

"네."

"이거... 이 암호도 풀어줄 수 있어?"

"네."

"지금 당장?"

"그건... 무리겠네요."

예상과 다르게 차분해 보이는 인간을 보고 하루는 의문을 느낀다. 화를 내지 않는 건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멀뚱히 인간을 쳐다본 하루 덕에, 결국 인간은 먼저 입을 열었다. 

"뭐. 왜 그렇게 봐?"

"왜 화 안 내세요?"

"내가 왜?"

"버림... 배신 당했잖아요."

"버림 안 받았어. 배신도 안 당했고."

"하지만..."

"그만, 됐어."

자신의 말을 끊고 휙, 뒤돌아 가버리는 인간의 뒷모습을 보면서. 하루는 섭섭함을 느끼는 대신 인간이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저건 마치... 그래, 현실을 부정하는 양상으로 보였다.

결국 에너지 충전 일정이 있는 저녁까지 인간은 하루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고, 하루는 암호를 기억해 인간에게 '암호 풀어올게요.'라는 말을 남긴 뒤 센터로 돌아갔다.

 


 

"1308, 배신 당한 인간의 기분 같은 거 알겠어?"

"아니."

"좀 생각해봐~"

"요즘 인간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하는군."

"음. 뭐~ 요즘 인간 서적을 많이 찾아봐서 그런가."

대충 말을 돌린 하루는 내일 인간의 목소리를 들을 순 있을까, 하고 딴 생각에 빠져들었다. 자신에게 말을 걸어놓고 먼저 말을 돌리며 끊어버린 하루를 보며 W13081-us94는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다시 표정을 풀었다. 최근에 유독 심하긴 하지만 H18110-ta94는 항상 그래왔으니까. W13081-us94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하루는 데이터베이스를 뜯어가며 암호를 해독했다. 음, 인간에게 1308의 이름도 지어달라고 할까? 그런 생각도 했다.

 


 

어느새 3번째 탐사 시간이자 인간과의 3번째 만남. 마음 같아선 오늘도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아마 인간은 산뜻하게 하루를 무시하며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몰랐기 때문에 하루는 그건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더 인간과 친밀해야 더 많은 행동을 얻어낼 수 있으니까. 앞으로 8번 정도는 혼자서 연구하고 싶었다. 얼마 안 가 센터에 들키면, 넘겨야하잖아.

"암호 풀어왔어요."

"아, 어어 왔어? 하루도 참. 인사부터 해주라~ 놀랐네!"

별로 놀라 보이진 않았지만 하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암호는 뭐래? 물어오는 인간의 질문에 하루는 역시나. 라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제 6연구실 캐' 까지 말했을 때, 인간은 갑작스럽게 하루의 말을 막아왔다.

"아~ 잠깐잠깐!"

"뭡니까?"

"먼저 하루에게 전해 줄 말이 있었는데, 깜빡했어!"

전해 줄 말? 되묻는 하루의 말을 넘기며 인간은 자신의 주머니를 뒤적였다. 아니, 그게... 어제 종일 삐져있었잖아~ 근데 그게 하루 탓은 아니니까... 그런데 또 해주고픈 말을 적어두지 않으면 인간은 까먹어버려서. 알지? 그래서 어제 적어놨어~ 뒤적거리며 구구절절 혼잣말처럼 내뱉는 말을 들으며 하루는 인간의 말을 이해했다. 어제의 행동을 후회하는구나. 그래서 나에게 사과하려는 건가 보다.

미안해, 미안했어. 인간이 목덜미를 긁적이며 건네준 꾸깃꾸깃한 종이를 받아들면서 하루는 살짝 웃으며 괜찮아요. 하고 답했다. 그 웃음에 인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갈무리 했고, 종이를 보기 위해 고개를 숙인 하루는 그걸 보지 못했다. 종이엔 썩 바르지 않은 필기체로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음... 하루는 로봇이잖아? 아, 그니까 이건 시비 걸려고 적은 건 아니고... 자주 나 같은 사람의 감정은 잘 이해하지 못 하는 모습을 보였잖아? 어제는 사실 나도 조금 쇼크였는데, 하루의 무감정한 말에 사람인 나는 무지 상처받는단 말이야. 정말로. 응... 아니다. 내가 배신당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걸 납득 시켜주는 게 더 빠르겠네. 일단 소음 때문에 듣지 못한 부분 있잖아, 거기에 조금 희망을 걸어보고 있어. 게다가... 그동안 함께한 동료인데, 그렇게 말 한마디만 남겨두고 버리고 가버렸다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마지막에 하야토 군이 남겨준 무언가도 있고. 그렇지? 하루가 나에게 그렇다고 해주면 정말 안심 될 텐데. 오늘 그렇게 보내버려서 미안해.'

두서없이 적힌 문장에 하루는 웃음이 나왔다. 참, 인간 다워서.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역시 인간이다, 하는 생각을 하는 건 슬슬 그만둘 때도 된 것 같은데. 도저히 자연스레 드는 생각을 막을 수 없었다. 하루의 두 번째 웃음에 결국 인간은 놀란 표정을 한 번 더 지었고, 이번 표정은 갈무리하기 전에 하루가 볼 수 있었다.

"사과 편지가 감사해서요."

"...그렇구나."

텐도는, 인간은. 어쩌면 하루가 제 생각보다 더 인간과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술의 발전 완전 대단하잖아~ 속으로 가볍게 호들갑을 떨어준 인간은 그제야 편한 마음으로 하루에게 해석 된 암호에 관해 물어보았다. 어제부터 종일 신경 쓰였어.

그렇게 같이 '제 6연구실 캐비넷 중 내 캐비넷'으로 향했다. 무슨 암호를 저렇게 남겨? 진짜 하야토 군은... 그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헛웃음을 짓던 인간은 망설임 없이 36개의 캐비넷 중 5번째 줄 아래에 위치한 캐비넷을 활짝 열었다. 그곳엔 400년 정도 된 휴대용 카세트가 놓여있었다. 하루가 저거 쓸 순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든 말든 인간은 그것을 덥석 집어서 품에 안았다. 엄청 소중한 듯이.

하루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지만 인간은 '들을 수 있어, 사용할 수 있다고.'라고 중얼거리며 제 1연구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 카세트 플레이어에 끼울 수 있는 테이프는 있나. 저것에 얽힌 추억이 또 있는 걸까. 들은 이야기엔 없었는데. 400년 전 인간들은 무슨 노래를 들었을까. 하야토 군과 사용했던 카세트겠지. 혹은 그의 것이거나. 등의 생각을 하며 인간의 뒤를 따라가던 하루는 갑자기 멈춰 선 인간 때문에 그의 등에 부딪혔다. 

"하루, 지금 돌아가 줘."

"...네?"

"아... 못 들었어? 나가 달라고."

이상하네. 뭐가 그렇게 화가 난 걸까. 어제는 그래도 종일 곁에 있기라도 했는데. 위잉, 익숙한 소음을 귀에 담으며 하루는 오늘의 진짜 담당 구역으로 향했다. 뭐 였을까? 인간의 목소리엔 짜증과 분노가 담겨있었다. 그리고 약간의 슬픔도. 아 조금만 더 생각하면 무슨 심정일지 유추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루는 지금 인간에게 가서 물어보고 싶은 걸 꾹 참으며 '다음 탐사 시간에 찾아가도 되겠지? 또 사과 편지를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 아니면. 이번엔 정말 내 잘못일까? 무기질적인 로봇의 어쩌고 행동이 인간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가능성이 두둥실 떠올랐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 소리가 청각 센서에 잡힌다. 여긴 구조물로 들어가는 개구멍으로부터 91m나 떨어져 있는데도 그랬다. 인간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하루는 스스로 급해진 마음을 느끼며 이동 장치를 약하게 내리쳤다. 왜 더 빨리 움직이지 않는 거야. 저 멀리, 굽은 등을 한 채 개구멍 옆에 앉아있는 인간의 붉은 머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서 들어가세요."

"..."

"노래 소리도 끄세요."

"..."

"지금 뭐하시..."

"하루 왔어?"

쉰 목소리로 고개를 돌린 인간의 눈엔 눈물이 걸려있었다. 울었던 시간이 꽤 길었는지 인간의 상태는 썩 좋아 보이지 않아서 하루는 처음으로 답답함을 느꼈다. 울고 있는 인간은 어떻게 달래야 할까. 계속 밖에 있을 수는 없었다. 혹여나 발견되면 바로 센터 행이니. 하루는 기억을 되짚어 인간이 가장 크게 반응했던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으니 노래 소리를 줄여주세요."

인간은 하루 쪽을 쳐다보지 않은 채로 노래 소리를 줄였다. 일단 이 정도면 당장은 괜찮을 터였다. 하루는 조금 안심하며 말을 이었다.

"마지막으로 당신과 헤어졌을 때, 제가 무슨 잘못을 한 건가 싶었어요."

"아... 아냐, 그런 건."

"그런 가요."

"? 하루... 그거 뭐야?"

"사과의 의미로 가져왔습니다."

하루는 등 뒤에 숨기듯, 하지만 확실히 인간이 볼 수 있게 들고 있었던 꽃을 다시 한번 꾹 쥐었다.

텐도는, 인간은.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올려 드디어 하루와 눈을 마주쳤으며 약하게 지은 미소를 보고 마음이 조금 진정됨을 느꼈다. 진정하는 찰나에 시야에 들어온 흰 꽃에 다시 놀라고 말았지만.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인간을 마주 보며 하루는 선물 선택을 잘못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마눌 님 커미션

 

그도 생명이고, 이것도 생명이니. 좋아할 것 같았다. 

그래서 준비했건만... 이번에도 자신의 예상이 틀렸을까. 점점 삼천포로 빠지는 하루의 생각을 붙잡듯 인간이 눈물을 멈추며 약하게 웃었다.

"하하... 날 위해 들고 온 거야? 여기까지?"

"네. 마음에 드나요?"

"응. 아마 하루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들어 하고 있을 걸."

여기 주변은 다 황야잖아. 그래서 엄청... 오랜만에 본다, 꽃. 하루는 큰일 났네, 꽃 선물은 거의 고백인데. 나 좋아해? 쉰 목소리로 평소처럼 조잘조잘 얘기하는 인간을 보고 하루는 처음으로 인간이 말을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쉰 목소리는... 왜인지 듣기가 힘들었다.

"좋아해요."

그런데 고백이라는 정보는 들은 적 없는데요. 그리고 인간은 말을 그만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들어가서 물을 섭취하고 말해 주세요.

자신의 말에 당황한 표정으로 무언가 말 하려는 인간을 막으며 하루는 그와 같이 구조물 안으로 향했다. 인간은 그의 말을 막은 것이 조금 불만인 듯싶었지만, 하루가 알 바는 아니었다. 급하게 개구멍으로 들어오는 와중에도 카세트 플레이어를 잘 챙겨 주머니에 넣은 인간은 조금 신기했지만.

아늑한 구조물의 아늑한 거실로 들어온 인간은 하루의 말대로 물을 마신 뒤 그와 함께 소파에 앉았다. 이어진 인간의 말을 축약하면 대강 이렇다.

어제는 인간의 잘못이 맞고, 꽃 선물은 고맙다. 잘 보관하겠다. 이상 행동을 보인 이유는 비참했기 때문이다. (맞아, 이 단어였다. 역시 인간에게 물어봤다면 빨랐겠구나) 자신처럼 홀로 캐비넷에 남겨진 자신의 카세트 플레이어를 보니, 그것을 사용하면 눈물이 날 게 뻔한데 감정이 뭔지 자꾸 물어오는 로봇이 옆에서 이런저런 질문을 해올 거라 생각하니 화가 났고, 이런 걸로 화가 난다는 사실이 비참했다고 한다.

이 말을 대략 2시간 동안 눈물을 흘리다, 멈췄다가. 빙 돌았다가, 와르르 쏟아냈다가 하며 말해준 인간은 조금 지쳐 보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노래라며 카세트로 노래를 들려주었다. 그와 어울리지 않게 조금은 잔잔한 선율이 흘러나왔다. 또한 어울리지 않게 잔잔한 목소리로 인간은 이 노래가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노래라고 알려주었다. 종말(終末), 계속된 일이나 현상의 맨 끝을 뜻한다. 인간들이 정해놓은 뜻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루가 알고 싶은 건 그런 사전에 박힌 듯한 게 아니었다.

"당신의 입장에선 그것이, 종말이 무엇을 뜻하나요?"

"종말이라. 글쎄... 그건 아마."

 

세상의 종말은, 서로를 기억할 존재가 아무도 없는 게 아닐까. 

그러니 너는 나를 떠나지 마 하루야... 나를 기억하고, 평생 잊지 말아줘.

울면서 자신에게 안겨 오는 텐도가. 하루는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다.

다른 2세대 로봇이 곧 이 구역을 탐사한다는 의미였다. 하루에게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는데. 1. 그동안 그랬던 것처럼 다행히 센서에 걸리지 않는다. 2. 걸려서 텐도가 센터에 끌려간 다음 중앙으로 운송된다. 3. 텐도에게 탈출을 권한다. 등. 무엇이 가장 괜찮은 선택일까? 솔직히 말하면, 일단 1번과 2번을 선택지로 두긴 했지만 절대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1번은 2번의 위험성이 있다. 텐도가 센터에 넘겨져 자신처럼 이곳에 묶여 지낸다면... 로봇들 처럼 일정한 스케줄대로 움직여야 한다면. 그런 가정은 상상도, 계산도 하기 싫었다. 하루의 안에서 텐도는 이미 이 지구에서 무엇보다 자유로운 존재이며, 유일한 인간이었다.

자세히 알아본 결과 인간은 깔끔하게 자연으로 돌아간 것이 맞으며. 텐도의 경우는 우연, 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어쩌면 필연이 아닐까? 하루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인간을 볼 수 없게 된 지 정확히 83년이 흘렀어.'

거짓말이다.

'나는 이 구역에서 만들어져서 다른 구역은 어떤지 잘 몰라.'

거짓말이다.

'센터의 눈을 피하기 위해선 이것만 기억하면 돼.'

이건 사실이다.

 

그러니, 살아남아.

며칠 동안 깊이 고민하던 텐도는 결국 구조물과 현재 구역을 떠난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최종 목표는 다른 인간을 찾는 거라고 그렇게 말해줬다. 

당연히 찾지 못할 것이고, 텐도는 머지않아 확실히 죽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이 선택으로 자신이 자유롭다고, 인간이라고 느낄 수 있다면야. 그를 진심을 다해 도울 것이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아름답고 눈부신 인간을 보라. 하루는 텐도를, 그의 행동 자체를 사랑했다. 결국 텐도가 자신의 손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하루는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역시 인간은 제 손에 가둘 수 없는 존재임을 상기할 수 있었기에 이것으로 만족했다. ...만약 모든 걸 포기하거나 현재에 안주했다면 하루는 그를 사랑했을까?

응, 그랬겠지만. 

"하루, 네가 전에 부탁했던 거 생각해봤어."

"뭔데?"

"네 친구 있잖아. 1308. 걔 이름은 와카토시 어때?"

"좋아. 꼭 전해줄게."

넌 H18110-ta94 잖아. H와 a가 있으니, Haru. 하루야. 네 친구 W13081-us94 는 W와 s. Wakatoshi. 이건 그냥 새로 지은 거나 마찬가지지만. 사실 무뚝뚝하고 커다란 친구라고 해서 내 예전 친구 이름을 붙인 거야. 알고 있었지? 응, 사토리 네가 얘기해준 이름이니까.

마지막 대화인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가볍고 일상적이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텐도는 하루를 떠나 저 황야로 사라졌다. 

 


 

결국 마지막까지 내 예상이 틀렸다.

보잘것없는 확률은, 그에 맞춰 행동하는 로봇들에게나 해당하는 거였구나. 인간은 항상 예상 범위를 벗어난다고 몇 번이나 읽었지만 실제의 경험은 아마 다시는 겪을 수 없을 테니 참으로 진귀했다.

나이 든 텐도의 모습은 참으로 신기했다. 텐도 몰래 그에게 심어둔 위치추격기가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움직이다 대략 30년이 지난 후 눈에 띄게 느려졌을 때 마지막으로 느꼈던 감정이었다. 센터의 눈을 피해 사고사도, 병사도 아닌 자연사라니. 그의 시신을 수습하며 하루는 살포시 그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드디어 하고 싶었던 리스트 중 '인간의 최후 목격하기'를 이뤘다. 기다리던 순간이고 드디어 목표를 이뤘는데도 뭔가 부족한 이 감정은 뭘까. 텐도를 마주치기 직전에도 이런 감정을 느꼈었다.

아. 너에게 물어보는 것을 깜빡했구나.

난 평생, 이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어쩌지 벌써 네가 그립다. 네가 죽음으로서 인간은 종말(終末)을 맞이했다. 하지만 네가 알려준 종말이란, 이런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음을 기억한다. 넌 이제 의식이 없으니 너의 세상에서 종말을 맞이했지만. 나는 널 평생토록 기억할 테니,

네 종말은 영원히 오지 않겠다.

 

 


21.05.17 ~ 21.06.26

 

 

'서브 > 牛永天' 카테고리의 다른 글

Drawing  (0) 2022.06.14
체육대회  (0) 2022.06.14
Monologue  (0) 2022.06.14
QnA 3  (0) 2022.06.14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