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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케
다 읽고 나서, 첫 문단? 첫 챕터 부분을 다시 읽으면 재밌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삐비비빅, 삐비비빅.
무기질적이지만 아키요시에겐 충분히 위협적인 알람이 귀를 꿰뚫는다. 뚝, 반도 떠지지 않은 눈꺼풀을 움직여 알람을 끈 아키요시는 나오는 한숨을 그대로 뱉었다. 1교시는 진짜 최악이구나. 반쯤 덮혀져 있던 이불을 걷어내며 아키요시는 대학에 갈 준비를 했다.
강의실이 있는 건물로 들어가기 전, 아키요시는 카페에 들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챙겼다. 슬슬 키오스크에 적응할 때도 되었는데 어째 사용할 때마다 버벅거리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가 도와준다면 좋을 텐데...
그런데 누가? 아키요시는 누군가에게 이러한 도움을 받은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도움을 바란다는 건 조금 웃기지 않나. 아직 시원해지지 않은 커피를 마시며 피식 웃음을 흘린 아키요시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강의실로 향했다. 졸업까지 단 한 학기, 아마도 6, 7개월 정도의 시간이 남았으니 슬슬 졸업 후에 어떻게 할지도 생각해야 한다. 사소한 것까지 남의 도움을 받고 싶어 한다면, 인생을 혼자 살아가야 하는 아키요시는 썩 무능하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좋은 아침."
"아, 좋은 아침. ...유바?"
"네 녀석, 왜 의문문이냐."
"하하, 이름 잘 못 외운다고 했었지? 노리토."
"미안. 그래도 슬슬 외우는 중이야. 음, 키자키?"
"카키자키."
살짝 뜸을 들인 뒤 대답한 카키자키가 아키요시에게 아침 대용의 스낵바를 건넸다. "고마워." 대답하자 밝은 미소가 돌아왔다. 4학년, 그러니까 올해 들어서 친해진 같은 과의 둘은 혼자 다니던 아키요시에게 먼저 다가와 주었다. 아키요시가 왜 지금의 전공을 골랐는지는 의문이지만, 어찌 됐든 보더와 제휴를 맺고 밀접적인 관련을 가진 아키요시의 과는 당연하게도 보더 대원들이 가득했다. 신설된 지 얼마 안 된 새로운 과는 전공 교수도 학생도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은 모두가 2, 3가지 버전로 구성된 고정 시간표를 받는다. 총인원은 학년 당 30명 안팎일까.
시간표를 짜기 위해 수강 신청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나쁘지 않았지만 강제로 1교시를 들어야 하는 건 아주 나쁜 점이다. 아키요시의 기분이 어떻든 보더 대원과 일반 시민이 적절히 섞인 과에 아키요시는 적응했다. 잠깐, 적응했다? 처음부터 익숙했었다는 게 더 옳은 말이다. 애초에 누가 대원인지 아닌지도 아키요시는 몰랐으니까. 가벼운 가방을 뒤적여 펜 하나와 보더 기술 관련 자료를 꺼낸 아키요시는 유바가 이끄는 대로 적당한 자리에 착석했다. 아, 과제 안 했는데.
"이번 학기 중간 시험은 저번 학기와는 달리 조별 과제로 대체합니다."
아키요시는 교수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자료의 종이 귀퉁이를 만지작거렸다. 원래라면 남는 조에 들어가거나 했겠지만, 아마 카키자키나 유바가 자신을 끼워주진 않을까. 아키요시는 퍽 희망적인 예상을 하며 옆에서 '손 좀 가만히 둬.'라고 저를 내려다보는 유바의 말에 책상 밑으로 손을 내렸다. 아키요시도 졸업할 생각은 있었으니 졸업반으로 올라온 저번 학기부터는 꽤 성실하게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오늘 과제를 하지 않은 사람이 말하면 조금 웃긴가? 유바와 카키자키는 성실한 성격이니 같은 조에 끼워준다면 이 수업은 성공적이겠다.
"조는 제가 임의적으로 편성했습니다."
오늘 오지 못한 대원들도 있고, 대원으로만 짜여지거나 일반 학생으로만 짜여지면 수업에 대한 의미가 없어져 어쩌고 저쩌고. 아, 짜증난다. 아키요시는 다시 종이 귀퉁이를 괴롭히며 교수가 띄워주는 조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았다. 1학년과 2학년이 섞여있고, 3학년과 4학년이 섞여있다. 3학년이랑 같이? 벌써 피곤한데. 가득 적혀있는 한자 중에서 아키요시가 알아볼 수 있는 이름은 적었기 때문에 카메라를 확대해 자신의 조를 촬영한 뒤 아키요시는 수업을 드랍할까. 뭐 그런 턱도 없는 생각을 했다.
임시 팀장에게 연락처를 넘긴 뒤 유유히 사라져 버린 교수의 뒤통수를 노려 본 아키요시는 그나마 수업이 안내만 하고 빨리 끝났다는 점에서 약간의 위안을 얻었다. 팀장이 먼저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방금 전 촬영해 둔 자신의 조원을 확인하면 되겠지만 아키요시는 확인하는 것 자체에 귀찮음을 느끼며 머릿속으로 다음 수업이 3교시임을 기억해냈다. 카페라도 갈까. 수업이 끝난 뒤 인사를 마치고 사라져 버린 유바와 카키자키의 빈자리가 다가와 아키요시는 새삼스럽게 친구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친구를 더 사귀어야 하나, 어차피 곧 졸업이긴 하지만. 강의실에서 나와 천천히 카페로 발걸음을 옮기던 아키요시를 모르는 목소리가 불러 세운다.
"으음, 노리토 아키요시?"
뒤를 돌아보면 역시나 모르는 사람이다. 키가 꽤 커서 자연스레 고개를 위로 들며 아키요시는 "맞는데요." 대답했다. 분명 모르는 사람인데 웃고 있는 얼굴이 어딘가 익숙하다. 어디선가 본 사람인가?
"아~ 진짜네. 이거 정말 곤란한데."
...너한테 말한 건 아니야. 우리 팀 관련해서 잠깐. '팀?' 이유는 모르겠지만 상대가 변명을 내민 걸 신경 쓰지 않으며 아키요시는 어렵지 않게 눈앞의 사람이 왜 자신에게 말을 걸었는지 유추할 수 있었다. 왜 익숙한 얼굴인가 했더니, 가방 하나 들지 않은 이 사람은 '보더의 타치카와'다. 아키요시가 사진을 찍으며 확인했던 이름 중에서 유일하게 알던 이름이기도 했다. 뭐... 대학의, 미카도의 유명인이니까. 팀은 아마 조별 과제를 위한 무작위의 조를 말하는 거겠지.
"곤란할 게 있나요?"
"그것보다, 어디 가던 중이었어? 카페라도 갈까? 거기서 얘기해줄게."
별로 듣고 싶지 않았지만, 아키요시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에 가던 길이기도 했으나 먼저 찾아와 줬다면 과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다는 거고, 아키요시는 학점이 필요했다.
"한 놈은 우리 대원인데, 별로 대학에서 본 기억은 없네. 연락은 해보겠지만 기대하지는 마. 아, 그리고 너보다 한 살 어려. 나머지 한 놈은 4학년인데 대원은 아니야. 근데 얘는 이번 수업 날린다고 했거든."
말을 마친 타치카와가 본인이 주문한 그린 글레이즈드 어쩌고 프라... 뭐? 를 마시는 걸 보며 아키요시는 참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말의 내용은 이해했으므로 아키요시는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서. 타... 치카와 씨는 어떻게 하려고요? 안 할 건가요?"
타치카와는 애매하게 웃었다. 아키요시는 그 표정이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아키요시가 표정을 구기자 타치카와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딱히 안 할 생각에 고민한 거 아니야. 그런 표정 안 지어도 돼. 두 명이서 과제 잘해보자고?"
"아, 네."
"타치카와 케이야, 잘 부탁해."
"노리토 아키요시입니다. 그리고, 미리 말씀드리자면... 제가 이름을 잘 못 외워서 실수할 수도 있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괜찮아, 괜찮아~ 손을 팔락거리던 타치카와는 자신의 휴대폰 시간을 내려다보았다. "노리토는 다음 수업 언제야?" 아키요시도 마찬가지로 시간을 확인했다. "12시에 하나 있네요." 활짝 웃으며 "나돈데." 라고 대답한 타치카와를 쳐다보며, 아키요시는 과가 작으니 당연히 시간표도 비슷한 건데. 모르는 걸 보면 대학 대충 다녔구나. 정도의, 아마 말로 뱉지 못할 생각을 했다. 아키요시는 추측만 무성한 타치카와의 소문을 떠올렸다. 작년에 휴학을 했다가 올해 복학을 했다. 아니다, 3학년 때 유급을 한 거다. 사실 그것도 아니고 그냥 졸업을 못 한 거라 4학년을 한 번 더 하고 있다. 등등, 본인이 대자보를 붙여 공표할 수도 없으니 진위 여부는 불확실 하지만. 아키요시는 오늘부터 유급설을 믿기로 했다.
뭐든, 그 뒤로 아키요시는 대학에서 종종 타치카와를 마주쳤고 인사를 주고받았다. 같은 학년이라면 1학기 때도 분명 대학에서 마주쳤을 텐데 아키요시의 기억엔 없다. 그 의문을 아키요시는 유바에게서 듣게 됐다. 정확히는 같이 수업을 듣기 위해 이동 중에 마주친 타치카와가 인사를 하며 대화를 걸었을 때 알게 된 거지만.
"오~ 유바랑 카키자키. 그리고 노리토도 있네."
"안녕하심까, 타치카와 씨!"
"안녕하세요."
"셋이 같이 다니는구나, 친해? 의외, 라고 해야 하나."
타치카와의 말에 카키자키가 고개를 숙이며 작게 하하, 하고 웃었다. 퍽 어색한 웃음이다. 보더에서도 대학에서도 선배라고 기강... 이라도 잡는 건가. 아키요시의 생각이 너무 다른 곳으로 튀기 전에 유바가 힘차게 다른 주제를 꺼냈다.
"대학에서 보는 건 오랜만임다, 졸업하시는 검까?"
"유바 쨩, 난 원래도 졸업할 생각이었어?"
그렇습니까... 아키요시는 유바의 표정을 보고 타치카와가 대학을 자신처럼 다녔을 거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도 아키요시와의 조별 과제는 하기로 했으니 다행이군. 중간 기간은 눈 깜빡하는 사이에 다가오니 아마 곧 약속이라도 잡고 만나야 할 것이다. 오며 가며 인사를 몇 번 나누니 아키요시도 얼굴은 익숙해져서 둘만 만난다고 해도 과제를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어색하진 않을 것 같았다. 음, 아마. 카페에서 처음 대화를 나눴을 때 어색함을 느끼지 못했으니 어쩌면 편하게 느끼는 걸지도 모르지만. 성격 때문인가 역시.
이어진 수업에서 결국 아키요시는 집중하지 못했다. 타치카와가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그 사람이 신경 쓰였다. 헉! 좋아하는 거 아냐?! 하고 발랄하게 말하기엔 아키요시 머릿속의 꽃은 아직 한참이나 부족하다. 그게 아니라... 그래. 말하자면 차마 다 먹지 못하고 남겨 버린 식사 같았다. 비교 대상이 이상하지만 굳이 아키요시의 표현으로 빗대자면 그런 느낌이었다.
"왜 그래, 노리토?"
수업이 끝나고도 계속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아키요시의 모습에 카키자키가 슬며시 말을 걸었다. 아키요시는 잠깐 이걸 말해도 되는지 고민했다. 카키자키의 많은 것을 아는 건 아니었지만, 그라면 '그거 좋아하는 거 아니야?' 정도로 대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어차피 카키자키가 아니면 털어놓을 곳도 없지만. 아키요시는 아마도 보더로 출근했을 유바가 있었다면 어떤 대답을 했을까를 상상해보며, 카키자키에게 "타치카와 씨가 이상한 방향으로 신경쓰인다."고 대답했다.
"그건, ...그렇구나."
그리고 카키자키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키요시는 역시 자신이 새로 사귄 친구를 잘 아는 건 아니라고 마음을 굳히며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아키요시가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을 이어가다 슬슬 내일의 저녁 메뉴를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 즈음, 카키자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친해져 보는 건 어때? 타치카와 씨랑. 어쩌면 잘 맞을 수도 있고, 본인에게 이유를 물어봐도 되잖아."
아키요시는 카키자키의 말이 뜬금없지 않나. 멀뚱히 듣다가 그것이 자신이 털어놓은 질문에 대한 조언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너무 오래 고민한 거 아냐?"
"음... 그런가?"
평소의 미소를 지어준 카키자키와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진 아키요시는 카키자키의 조언이 과연 어떨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단순하고 명쾌한 이 조언에 문제가 있다면... 일단은 아키요시가 친해지고 싶다고 친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닌 점일까, 아키요시는 카키자키처럼 친화력이 뛰어나지 않았다. 이게 가장 큰 이유이다.
그리고 사실은,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타치카와가 신경 쓰이는 게 사라질 거라고 아키요시는 생각한다. 뭐, 그래도.
그래도, 아키요시는 마지막의 '본인에게 이유를 묻는' 건 할 수 있었다. 그건 친해지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거니까.
...만약 기회가 된다면.
'특수 연구 기술 공학', '단체 행동과 작전 연표', '전술 전략에 의한 요격 배치'.
뭐라는 건지... 아키요시는 눈가를 짓누르며 피로함을 느꼈다. 정말 이 과엔 왜 온 거지 나? 떠올리려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마 네이버에 대한 원망으로 들어왔을 수도 있겠다. 엉망이었던 고등학생 시절을 생각하면 대충 납득은 갔다. 따각 따각 마우스와 키보드를 두들기던 아키요시를 타치카와가 슬쩍 바라보았다. "힘들어 보이네." 무슨 당연한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약하게 눈을 흘긴 아키요시는 다시 시선을 노트북에 고정했다. 시험 과제를 위해 한 두 번 만난 것도 아니었지만, 도대체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더디게 나가는 진도는 명확하게 아키요시와 타치카와 둘 모두의 무능함 탓이다.
타치카와는 아키요시가 과제를 못 한다고 해서 탓하지 않는다, 아키요시 역시 타치카와가 한자를 알려달라며 말을 걸어도 화내지 않았다. 아키요시도 사전을 찾았기 때문에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포기할까."
아키요시가 습관처럼 입에 올린 포기의 말에, 자료를 뒤적이던 타치카와가 또다시 아키요시를 바라보았다.
"이런 말이 습관이라서."
"응, 그렇지. 뭐~ 그럴 것 같았어."
"타치카와 씨는 얼마만큼 했어요?"
"요만큼?"
타치카와가 휙 돌려준 노트북의 화면은 2시간 전에 확인했던 것과 비교하면 큰 변화는 없었다. 미비하군. 아키요시는 제 화면도 확인했다. 역시나 미비했다. "그래도 제출이라도 하면 C는 나오겠죠." 아키요시의 말에 타치카와는 웃었다. "확실히."
1시간 반이나 더 붙잡고 있었지만, 별로 나아진 건 없는 상태로 아키요시와 타치카와는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기 때문에 타치카와가 밥을 사주겠다며 아키요시를 식당으로 이끌었고, 아키요시는 사준다면 굳이 거절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얌전히 타치카와의 뒤를 따랐다. 항상 지나다니지만 외우지 못하는 길을 지나고 도착한 곳은 아키요시도 아는 식당이었다. 이곳은 아키요시의 자취방 근처 기도 했다.
"여기, 제 집 근처네요."
"그래?" 자리에 앉아 타치카와가 따라서 건네 준 물을 마신 뒤, 천천히 아키요시가 대화를 열었다. 타치카와가 "그런 말 해줘도 돼?" 정도로 반응했지만, "이 주변에 아파트와 빌라가 몇 갠데요." 태연하게 넘겼다. 오전 수업이 많아서 역시 힘들다는 아키요시의 말에 대답하며, 타치카와는 자연스럽게 이것저것 주문을 마쳤다. 타치카와와 아키요시가 식사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타치카와는 원래도 이렇게 자기 멋대로 주문하는 걸까. 아키요시는 남이 정해주는 메뉴가 편했기 때문에 확실히 이 편이 좋았지만, 아마 주변인들에게 퍽 불만을 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주문했어요? 맘대로 시키셨네요."
"응? 아...~ 그렇네. 미안, 미안. 이거랑 이거. 괜찮아?"
"네 좋아요. 타치카와 씨는, 항상 주문 도맡아서 하세요?"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노리토... 너라면 괜찮을 것도 같아서. 아키요시는 "얼추 맞아요. 이게 편하네요." 하고 말하며 타치카와가 주문한 메뉴를 다시 살펴보았다. 맛있을 것 같네. 타박하듯 말했지만, 뭐. 뻔한 장난이었다. 타치카와도 가끔, 어쩌면 자주. 장난치듯 가볍게 말을 하니 아키요시도 최근 들어 점점 편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역시 진전되지 않는 과제와, 대학이 원하는 수준에 턱없이 부족한 둘의 지식 때문이겠지. 아키요시가 조사 후 뽑은 자료를 이해하지 못해 구겨버릴 때, 타치카와는 '아~ 글렀어 이건.' 정도의 혼잣말을 하며 노트북을 가볍게 닫는다. 그러면 그날의 과제는 거기서 끝이다. 항상 이런 루틴이었다.
"남겨도 돼."
두 명이서 먹기엔 조금 많은 3인분 정도의 식사를 보며 막 젓가락을 든 아키요시에게, 타치카와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안 남길 것 같은데요." 아키요시의 대답에 타치카와는 냅킨을 꺼내 아키요시의 숟가락 밑에 깔아주었다. "그래." 타치카와에게서 눈치채지 못할 만큼 한숨이 섞인 대답이 나왔다.
아키요시의 말처럼 식사는 남지 않았다. 아키요시가 1인분 정도를, 타치카와가 2인분 정도를 먹긴 했지만. "나 배 터져서 죽을 것 같은데~ 이거 못 걸어 진짜로." 식당에서 나와 나란히 걷는 도중 통통, 배를 두드리며 엄살을 피우는 타치카와의 목소리에 아키요시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 걸로 안 죽어요." 타치카와가 더 엄살을 피울 거라고 생각했던 아키요시는 타치카와가 아무 대답이 없어, 정말 배부른가. 싶었다. 아키요시가 계산한 것도 아니니 사실 남겨도 상관없었을 텐데. 멍하니 집에 가는 길을 걷는데, 문득 타치카와는 방금 전 지나친 골목에서 반대로 향해야 버스 정류장에 갈 수 있었다는 걸 눈치챘다. 아키요시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하기 전, 타치카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키요시."
"...? 네."
"존칭, 안 붙여도 돼." 어느새 멈춰버린 타치카와를 보기 위해 아키요시는 뒤를 돌았다. 노을을 등지고 선 타치카와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존댓말도, 한 살 차인데 뭐. 안 해도 괜찮고." 평탄한 어조가 들려온다. "노리토 너를 아직 이름으로 부르는 건 좀 그런가?" 아, 말끝이 약간 흔들렸다.
"괜찮아요."
아키요시의 대답에 타치카와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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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치카와는 보더 복도를 걸으며 다시금 휴대폰 액정을 확인했다. 시노다가 사적 연락으로 자신을 호출한 건 꽤 오랜만이었다. 무슨 일일까. 저번에 임무 관련 보고서는 제출했으니 그건 아닐 텐데. 뭐, 그것도 2주일 지각했으니 혼나긴 혼났지만. "들어갑니다~" 허락받을 생각도 없었다는 듯 지체 없이 문을 열고 본부장실로 들어간 타치카와는 제일 먼저 아키요시와 눈을 마주쳤다. 역시나 있었군. 아키요시의 앞에 시노다가 앉아있었다. 검은색 뒤통수가 눈에 들어온다.
"이리 와서 앉아."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앉을... 건데, 음."
타치카와는 어딘가 굳은 시노다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들어오면서 '케이, 노크라도 하라고 했잖아.' 정도의 잔소리도 생각해보니 하지 않았다. 아키요시는 항상 무표정이니 방의 분위기를 읽는 게 살짝 늦어져 버렸다. 이건 내 탓은 아니지.
"바로 본론을 말하자면, 아키가 보더를 나가기로 결정했다."
타치카와는 천천히 옆에 앉은 아키요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왜?" 자연스럽게 의문이 들었다. 그걸 말로 했다는 건 아키요시가 대답해 주어서 눈치챘다.
"지쳤어."
뻔한 대답이었다. 정말 뻔하다. 타치카와는 얼마 전에 있었던 일련의 일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확실히, 지쳤을 것이다. 타치카와는 생각했다. 조금 뜬금없지 않나? 아, 그런데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긴 해. 왜 말을 안 했지? 아아, 지금 말해주고 있구나. 고마워해야 하나?
"언제?"
많은 질문을 머릿속으로 넘기며 결국엔 저 질문을 입에 담았다. 저것 말고는 타치카와가 달리 할 말은 없었다. "준비가 되는대로, 일거다. 아마 짧으면 일주일... 길어봤자 3주일까." 시노다의 대답에 타치카와는 날짜를 가늠했다. 아, 가슴이 조금 답답하다.
"아예 다른 시로 가는 건가?"
그것에 대해 전해줄 게 있다. 그리고 이어진 시노다의 말은 참, 드라마 같기도 했다. 타치카와는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소파로 푹, 기대고 싶은 걸 몇 번이나 참아냈다. 음, 설명이 길다. 너무 길지 않아?
아키요시는 보더를 그만둔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일반 시민인 것이고, 트리온과 트리거, 네이버 어쩌고와는 떨어진 삶을 산다는 뜻이다. 아키요시는 5년 전 즈음에 입대해 19살인 지금까지 짧지는 않은 기간을 보더에서 보냈다. 지금도 보더에서 마련해준 경계 구역과 가까운 숙소에서 지내고 있다. 독단적이라는 문제점이 있긴 했지만, S급이 되고 나서 아키요시는 충분히 상층부에게 '함부로 떠들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는 인식을 줄 수 있었다. 상층부 나름대로의 신뢰, 그런 거지. 다른 시로 이사 가지 않을 거라고도 하니, 일반 트리거와 블랙 트리거를 반납하고 나가면 된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기 때문에 타치카와가 지금 여기에 앉아 있다. 아키요시는 지쳤다. 지쳐서, 보더에 대한 기억을 더 이상 가진 채로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아키요시는 이곳에 모든 기억을 버려두고 갈 것이다.
타치카와는 기억을 봉인한 경험이 없으므로 자세히는 모르지만, 기밀 처리해야 하는 내용은 대충. 트리온 관련, 네이버후드, 인간형 네이버, 원정, 그리고 이런저런 것들. 트리온에 관한 내용을 봉인하려면 훈련받았던 기억이 애매해지니 이것도 봉인. 거기서 생긴 관계도 자연스럽게 봉인이다. 어색하게 남아버린 관계에 대한 설명을 하지 못할 테니까. 네이버후드와 원정, 인간형 네이버는 묶어서 원정에 대한 기억을 봉인해버리면 된다. 그럼 아키요시가 A급이 되고 나서 원정을 목표로 했던 기간의 기억들을 조작해야 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그걸 봉인해버리면 2년이라는 적지 않은 기간 동안의 중간중간 시간에 뻥, 구멍이 뚫린다. 블랙 트리거 진니, 이것의 기억을 지우면 동시에 시노다의 제자로 들어갔던 기억마저 통째로 사라진다.
하나를 봉인하면, 어색함이 남는 자리를 메우기 위해 더 많은 기억을 봉인하게 된다. 지우고 지우다 보면 어차피 전부 지워야 하게 된다는 뜻이다. 아키요시는 굳이 봉인하지 않아도 되지만, 굳이 봉인하기를 본인이 희망하고 있다. 시노다가 차분하게 계속 말을 이어가고, 타치카와는 별 수 없이 턱을 괴며 이별을 준비했다.
"상층부의 회의에서, 아키의 기억 봉인 요청에 대한 허가가 내려왔다."
아키요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타치카와도 하지 않았다.
"다만 너무 많은 기억을 봉인하는 경우라, 조금 시간이 걸려. 그동안 아키는 '완벽히' 보더를 나갈 준비를 할 거다."
2주일 간, 타치카와는 아키요시가 어떻게 '완벽히' 보더를 나가게 되는지 지켜보게 되었다. 아키요시와 가까운 사람은 많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들 모두의 기억에서 아키요시를 지울 순 없었으므로 대신 간단한 공지 사항을 직접 구두로 전했다. 아키요시가 기억을 봉인하고 보더를 나가니 관계가 정리된다. 그렇게 아키요시는 모두에게 자신이 끔찍히도 싫어하던 '자신을 잊어달라'는 부탁을 담담하게 건넸다. 아키요시에겐 다행하게도, 친하지 않은 일반 대원 전부에게 전할 필요는 없었지. 아키요시의 사이드 이펙트는 참 여러 가지로 편리하다는 감상이 들었다.
아키요시는 보더에서 천천히 잊혀갈 것이다.
새삼스럽게 말하는 거지만. 시노다도, 타치카와도 아키요시의 일반인 전향을 반대하지 않았다. 아키요시도 '왜 말리지 않아?' 정도의 우스운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 일이었다.
[3조 | 타치카와 케이(임시 팀장), 노리토 아키요시 …]
타치카와는 첫날 수업 정도는 가서 듣는 편이다. 스승들의 날카로운 눈초리 때문이긴 하지만. 1년의 휴학을 마치고 복학 첫날의 1교시 첫 번째 수업에 들어가서 본 이름을 타치카와는 뚫어져라 볼 수밖에 없었다. 저 이름을 타치카와가 맞게 읽었다면 아마 '노리토 아키요시'이다. 대학에 동명 이인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면 아마 '노리토 아키요시'는 아키요시일 것이고.
타치카와는 웃음이 나오는 걸 내버려 두었다.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면서, 아...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음, 노리토 아키요시?"
강의실에서 나와 익숙한 머리카락을 쫓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연락처는 받을 필요도 없어서, 받지 않았다. 나머지 두 명은 타치카와가 신경 쓸 바가 아니다. 타치카와의 목소리에 아키요시가 뒤를 돌았다.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변한 게 없는 모습에 타치카와는 울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드라마에서도 보통 이런 장면엔 이렇게 말하던데.
"맞는데요."
"아~ 진짜네. 이거 정말 곤란한데."
타치카와는 정말 곤란했다. 3년, 타치카와는 긴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보더가 4년 사이에 얼마나 성장했었는지를 가늠해보고, 아직 20대의 중반도 되지 못한 타치카와와 아키요시의 나이를 고려하면 역시나 퍽 긴 시간이다. 그 기나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타치카와는 여전히 아키요시를 보면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일반인이 된 보더 대원에게 접근하면 안 된다는 규정은 없다. 타치카와는 아무 변명이나 늘여놓으며 아키요시에게 웃어주었다. 곤란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며 존댓말을 뱉는 아키요시의 모습이 어딘가 거슬린다.
"타치카와 케이야, 잘 부탁해."
"노리토 아키요시입니다."
타치카와는 새삼스럽다는 감각을 떨치지 못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아키요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2년 간 보냈던 시간은. 이제는 오로지 타치카와 혼자 짊어져야 할 기억이다. 웃기지도 않아, 같이 보낸 시간보다 아키요시가 보더를 나가고 나서 지나버린 시간이 더 길다는 건. 이어진 아키요시의 이름을 잘 못 외운다는 말에 타치카와는 '그걸 내가 모를 리가 없지?' 라고 대답하고 싶은 것을 참아야 했다.
무려 몇 년이나 아키요시와 타치카와가 마주치지 않았던 이유는, 타치카와가 집-보더-집, 을 반복하는 생활을 보냈기 때문이다. 미카도는 좁다. 아마 시내라도 돌아다녔으면 몇 번쯤은 마주쳤을지도 모르지. 대학에 나오게 되자마자 이틀에 한 번 꼴로 아키요시를 마주쳐, 타치카와는 이 상황이 꽤 웃기다고 생각했다. 더 웃긴 건, 아키요시와 함께 다니는 '보더 대원'인 카키자키와 유바일까.
타치카와도 생각했듯이, 따로 규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아예 처음부터 친구 관계를 다시 시작할 줄은 몰랐다. 아키요시의 다른 친구들 얼굴도 떠올리며 타치카와는 웃는 표정으로 세 명에게 말을 걸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개인 랭크전을 주고받았던 유바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건 약간 충격인데. 물론 카키자키의 생각이라는 건 타치카와도 알고 있다.
아키요시가 강의실로 향하고, 오늘의 '자연스러운 만남' 볼일이 끝난 타치카와는 다시 제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아키요시가 좋아했던 과자 하나를 사고, 잠시 고민하다 타치카와가 먹어버렸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데, 이게 다 무슨 짓인가.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억을 잃은 그녀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러브 스토리? 나쁘지 않지만, 타치카와는 그런 고생을 사서 하는 취향은 아니다.
웅, 우웅.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아주 천천히 손을 옮겨 휴대폰을 꺼낸다. 화면엔 시노다의 공적 연락이 떠있다. '케이, 보고서 제출일이 벌써 2주 전이었다는 건 알고 있겠지.' 타치카와는 다시 화면을 끄고 떨어트리듯 침대에 손을 내려놓았다. 본부장의 연락을 무시하면 후폭풍이 따르긴 하지만. 그보다 시노다 씨는 공적 연락에서 케이라고 하는 것도 참 웃기지. 타치카와는 생각을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다, 문득 깨달은 사실에 다시 몸을 일으켰다. 시노다는 확실히 아키요시를 다시 본 적이 없다. 뭐, 시노다도 타치카와와 생활 루틴이 비슷하니까. 집-보더-집-보더.
아, 타치카와는 자신에게 아키요시와의 만남을 숨겼던 카키자키의 행동을 결국엔 납득했다. 그래도 시비는 걸었을 거지만. 타치카와는 앞으로 조별 과제를 위해 여러 번 만날 아키요시와의 일정을 떠올렸다. 미리 털어놓자면, 타치카와는 재깍재깍 보고 할 생각도 없지만, 별로 숨길 생각도 없다. 지금 당장의 얘기는 물론 아니고!
타치카와는 멀리 떨어진 풍경을 감상하는 기분으로, 아키요시와의 만남에서 아키요시를 구경했다. 기분이 주욱, 바닥으로 처박힐 때마다 저절로 이상해지는 표정을 숨기지 못해 조금의 의심은 받았지만. 그래도 대체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여전히 공부엔 재능이 없는 아키요시와 타치카와의 상황이 우스웠고, 여전히 툭하면 욕을 뱉는 습관도 웃겼다, 또 여전히 친밀하게 다가가면 속절없이 곁을 내어주는 아키요시가.
"여기, 제 집 근처네요."
"그래? 그런 말 해줘도 돼?"
"이 주변에 아파트와 빌라가 몇 갠데요."
타치카와는 여전히 거기서 사는구나~ 정도의 감상을 남겼다. 습관적으로 아키요시의 몫까지 주문한 건, 타치카와의 실수였지만. 이런 걸로 사람을 의심하는 놈은... 존재는 해도, 그게 아키요시는 아니었다. 장난스럽게 타치카와를 타박하는 아키요시의 말투가 너무도 익숙하다. 익숙한 말투로 '타치카와 씨'라, 그닥 유쾌하진 않네.
"남겨도 돼."
항상 이 정도를 주문하면 조금씩 남곤 했다. 버릇이 들어버린 말을 하며 타치카와는 아키요시를 보았다. 아키요시가 냅킨도 두지 않고 젓가락과 숟가락을 올려놓는다. 아, 이건 아키요시가 할 일도 제가 할 일도 아니다. 습관이 되어버린 건 지금의 두 명이 아니었다.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풍경의 변화를 타치카와만이 완벽하게 고칠 순 없다. 아마, 앞으로도 쭉 전의 풍경이 완벽하게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냅킨을 꺼내 깔아주고, 아키요시의 남기지 않겠다는 말에 대답을 했다. 그래, 타치카와가 다 먹는다면 아키요시의 말대로 될 것이다.
타치카와는 벌써 가을이 와버린 날씨에 아키요시가 곧 추워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퍽 감성적이게 됐는데, 아마 제 탓은 아니다. 냅킨 탓이다. 노을에 흔들리는 아키요시의 머리카락이 시야에 걸리고, 아, 그래. 새삼스럽게 아키요시가 그동안 만나며 입었던 옷 중 절반 이상이 타치카와가 추천하거나 선물했던 옷인 걸 떠올렸다. 즐거운 기억이다.
아키요시가, 버리고 간, 즐거운 기억.
"아키요시."
아키요시가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노을 때문에 발갛게 물든 얼굴마저 익숙하다. 타치카와가 노을을 받는 모습의 기억 따위는 아키요시에게 이제는 없다.
"존칭, 안 붙여도 돼." 여기서 더 가까워지면, 다시 친해지면, 아키요시가 또다시 타치카와를 소중하게 여기게 되면? "존댓말도, 한 살 차인데 뭐. 안 해도 괜찮고." 그게 타치카와가 원하는 것인가? 타치카와는 아키요시의 붉은 흉터를 바라보았다. 타치카와는 굳이 이유가 없어도 아키요시가 눈앞에 나타나 버렸다면 말을 걸 사람이다. 그리워 하든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든 말이지. "노리토 너를 아직 이름으로 부르는 건 좀 그런가?" 아마, 타치카와는 뒤늦게 이유를 찾고 있다.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계속, 만나도 되는 건가?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을 질문이다. 아, 말끝이 약간 흔들렸다.
"괜찮아요."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지 못할 이유 또한 없다.
타치카와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 여전히 1위야?"
"어느 종목을 말하는 거야? 팀? 어태커? 개인 종합?"
"그게 뭔데."
"하하, 당연히 전부 1위지."
"자기 자랑이네."
유지는 아니더라도, 결국 지금은 타치카와가 1위니 상관없다. '지금'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 타치카와는 그 무엇보다 지금이 중요한 사람이다. 엉망진창이었던 조별 과제를 제출하고, 타치카와와 아키요시와 나머지 기타 등등은 D를 받았다. C- 였던가? 타치카와는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기억나지 않는 학점을 쉽게 넘겨버리며 꽤 가까워진 아키요시를 내려다보았다. 딱 친한 대학 선후배 사이. 조별 과제를 하면서 타치카와가 평균적으로 과제를 위해 만나는 암묵적인 약속의 5배 정도 아키요시와 약속을 잡았다. 과제를 5번이나 같이 한 사이는 어떤 사이인 거지? 당연하지만 궁금한 것은 아니다.
"가볼게요."
"다음에 보자."
"들어가세요."
아키요시와 카키자키의 인사에 두어 번 손을 흔든 타치카와는 화면에 띄워놨던 자신의 시간표를 껐다. 보더로 가서 이것저것 한 다음에, 저녁 즈음에 연락을 하면 되려나. 타치카와는 4년 만에 익숙해진 캠퍼스를 걸어 내려가며 아키요시에겐 두 번째일 식사 약속을 잡을까, 고민했다. 타치카와는 당장 생각나는 아키요시와 갔었던 식당을 주르륵 떠올렸다. 참 많기도 해라. 버스에 앉아 인터넷을 들어간 타치카와는 여러 가지 식당 이름을 검색했다. 예약을 잡아두는 게 나을까? 일단 약속을 잡아야 만나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아마 오늘은 모두 시간이 될 것이다. 남이 들으면 우습겠네. 타치카와는 당연히 된다. 아마 다른 약속이 잡히지 않는 이상 아키요시도 된다. 한산한 대학생의 시간표는 다 그런 것이다. 그리고...
"글쎄다, 확인해볼게."
어딘가로 연락을 넣은 시노다는 다시 읽던 서류로 눈을 돌렸다. 아마 사와무라 씨겠지. 아직 대략 4년 정도는 혼자서 보더를 지탱해야 할 본부장을 바라보다, 타치카와는 직접 탕비실에서 꺼내 온 인스턴트 커피를 입에 머금었다. "맛없어." 본부장실에 앉아있는 둘 중 아무도 타치카와의 혼잣말을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 뒤로 15분 동안 타치카와는 조용히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지금 하던 것만 끝내면 가능할 것 같다."
"오, 그래? 그럼 예약한다~"
"몇 시에 끝날 줄 알고."
"7시에 예약하면, 시노다 씨는 그전까지 끝낼 거잖아?"
"... 케이."
"한 명 더 부를 건데 괜찮지? 조별 과제 끝낸 기념."
"아아, 상관없어. 케이 네가 조별 과제라니 별나군. 감사 인사는 했어?"
"심하네."
시노다는 타치카와가 서로 아는 친구나, 대원이나, 아무튼 간에 아는 사이를 불렀다고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일방적이지만 아는 사이니 틀린 예상은 아니지. 타치카와는 또, 웃거나, 찡그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 가게 앞에서도 이런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그건 시노다도 마찬가지겠지만. 타치카와는 아키요시가 보더를 나간 뒤로, 시노다에게서 아키요시와 관련된 그 어떤 얘기도 들은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에겐 어떨지 모르지만, 시노다 주변에는 딱히 의지할 수 있어 보이는 인물이 없었으므로 아마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을 것도 같다. 시노다의 주변이 믿음직하지 못한 게 아니라, 그냥 그것이 불가능할 뿐이다. 타치카와도 그다지 타인에게 의지하는 편은 아니니 비슷했다. 아키요시에 대해 얘기하거나, 떠올리는 일도 사실은 별로 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시노다는 모두가 의지하는 본부장이며, 타치카와는 믿음직한 이미지가 아니라는 점일까.
"케이, 그런데 식사는 갑자기 왜?"
시노다의 물음에 타치카와는 빙글, 시선을 돌려 탁자에 올려 둔 식어버린 종이컵을 바라보았다.
"가보면 알아."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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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학번 타치카와 케이: 오늘 7시에 저녁 같이 먹을래?]
아키요시는 얼마 전에 등록된 번호에서 온 연락을 확인했다. 딱히 약속은 없으니 괜찮긴 한데... 강제로 같은 조가 되어 한동안 사이좋게 앉아 머리를 싸맸던 한 살 위의 동기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타치카와가 유명인이 된 이유인 보더가 생각났다. 아키요시도 어떻게 보면 보더와 관련이 있었다. 일단 미카도에서 태어나 거주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보더에게 보호받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문제의 대학과 그놈의 과.
그렇지만, 아키요시는 보더를 생각하면 이유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조금 가슴이 답답해지고 멍한 기분이 들고, 그래. 거부감이 들어서 저절로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타치카와도 보더의 유명인보다는, 그저 우연찮게 팀원이 되어서 고생했던 동기. 정도로 생각하는 게 편하다.
아키요시는 자신의 사고방식이 이렇게 튀는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납득을 하고 있다. 그래서 신경 쓰지 않는다.
2학년이 되기 직전, 아키요시는 경계 구역에서 한 번 죽을 뻔했다. 어째서 아키요시가 경계 구역으로 향했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기억나지 않을 만도 하다. 눈을 뜨면 제 1차 대침공 이후로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거대한 네이버가 아키요시를 깔아 뭉개고 있었다. 비명 소리도 나오지 않고, 죽는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뭐, 아키요시가 지금 살아있으니 뻔하게도, 어디선가 보더의 대원이 나타나 네이버를 물리쳤고, 창을 든 소년이 아키요시를 일으켜 주었다.
"여기서 뭐하세요?"
"그, 음. 어... 나, 저도 잘..."
"어이구, 충격이 크셨나 보다. 검진받을 수 있는 곳이 있는데 보더에 데려다 드릴까요?"
"어, 네..."
"어이, 빨리 와."
"슈지 왜 화를 내~"
"이딴 일을 왜 우리가..."
앞서간 두 명의 소년이 무언가 대화를 했었던 것 같은데, 생각은 나지 않는다. 비틀거리는 다리로 얼마나 걸을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이상하게도 다리는 금방 안정을 찾고 걷는 데에 무리가 없었다. 충격을 너무 받으면 이렇게도 되는 걸까. 두 소년은 아키요시를 진료실보다는 실험실처럼 보이는 공간에 데려다주고 훌쩍 떠나버렸다. 임무 완료~ 창을 들고 있었던 소년이 밝게 외치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
"왜 이 근처에 오셨는지 기억나시나요?"
"아뇨..."
"어제 무엇을 했는지는요?"
"그냥 평소처럼... 윽."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네이버에게 머리를 크게 강타당한 것 같은데..."
백의를 입었으니 의사겠지, 아키요시에게 강타당한 건지 뭔지 어차피 알아볼 수도 없는 뇌 사진을 몇 개 보여 준 인상 좋은 의사가 간단한 결론을 내어주었다.
"단기 기억 상실증입니다."
겉으로 받은 충격도 있겠지만, 네이버를 가까이서 마주하고 죽을 뻔한 정신적 충격도 커서... 어쩌고, 저쩌고. 이게 무슨 드라마도 아니고... 멍한 기분으로 귀가를 한 아키요시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뭔가 떠올려보려 노력했다. 의사가 하지 말라고 했지만, 원래 아키요시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그러자 확실히, 일상을 살아가는데 문제는 없지만 뭔가 떠오르지 않는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키요시가 처한 상황은 드라마도 소설도 아니고 현실이었다. 오래전에 느꼈던 종류의 불안이 다시금 아키요시의 발목을 기어 올라왔고, 그것이 못내 소름 끼쳤다.
지금 아키요시의 상황에 납득이 되는 것도 있었으며, 납득이 되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그것의 진위 여부를 아키요시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당연하지만, 아키요시는 혼자였으니까. 텅 빈 주소록은 아키요시의 기억과 일치한다. 가족도 친구도 없어서 오히려 기억을 잃어도 불편함이 없다니, 참 우스운 상황 아닌가. 아키요시는 휴대폰의 달력에서 개강 날짜를 확인했다. 이건 기억이 난다. 다시 휴대폰을 껐다. 다쳤으니까, 한동안 학교는 무리겠군. 그리고 아키요시는 눈을 감아버렸다.
아키요시가 15살, 1차 대침공 당시에 폐허가 된 제 집의 잔해 위를 밟고 선 아키요시는 네이버를 보았다. 며칠 뒤, 지정된 보호 구역에서 밖을 내다보면, '보더' 역시 그곳에 있었다. 아키요시는 아마 보더에 들어갈까, 그런 생각을 했었을 것이다.
어린아이 혼자서 살아갈 순 없기에 보더의 지원을 받아 경계 구역 근처의 보더 소유의 숙소에서 쭉 지냈었다. 항상 보더의 건물을 보며 지냈으니 익숙할 만도 하다. 그리고 19살, 2시간이었나, 3시간 만에 끝나버린 2차 대침공은 아키요시가 피난도 하기 전에 일어났다가 끝나 버렸으므로 그리 기억나진 않는다. 그러다가 20살을 맞이한 기념 경계 구역에서 네이버에게 처맞고 어느 정도의 기억을 잃었다, 라.
어쩌면 아키요시는 이 기회에 보더와 멀어지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경계 구역 근처는 역시 위험했다. 아키요시가 스스로 경계 구역에 기어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보더는 친절하게도 아키요시에게 멀리 떨어진 1인 가구를 구하는 일에 지원을 해주었다. 그렇게 아키요시는 대학을 제외하고 전체적인 일상이 보더에서 멀어졌다. 게이트가 열리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으며, 보더의 앰블럼이 달린 옷이나 물건도 이젠 시야에 담기지 않았다.
아키요시는... 왜인지 이렇게 된 상황에 만족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아주 강하게 느꼈다. 아니, 확실히 그렇게 느껴야만 했다. 그래서 아키요시는 만족...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어디서?]
[OO학번 타치카와 케이: 여기로 와! (링크)]
[: 길 잃으면 늦을 수도 있어.]
[OO학번 타치카와 케이: 알지~ 그러니까 빨리 나와?]
아키요시는 휴대폰을 끄고 시간을 확인했다. 이르지만 지금 출발해도 괜찮겠지. 이미 갈아입고 세탁기에 넣어버린 옷은 내버려 둔 채, 아키요시는 옷장을 열었다. 링크를 확인해 보면 꽤 전통이 긴 이름 있는 좋은 가게였다. 언제 샀는지 기억나지 않는 단정한 가을 옷을 꺼내 들어 거울을 확인했다. 아키요시가 자주 입는 옷이다. 좋아하는 옷이었을까? 기억이 상실되면 원래 이런 것마저 기억나지 않는 건가?
아키요시는 정류장 벤치에 앉아 툭툭, 발로 바닥을 두드렸다. 길을 잃지 않아서 예정보다 40분 정도 빨리 도착했다. 모 아니면 도인 약속 시간을 지키는 방법에 헛웃음이 나온다. 아키요시는 띠링, 울리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OO학번 타치카와 케이: 말하는 걸 깜빡했는데, 한 명 더 올 거야.]
아키요시는 바로 나오는 한숨을 크게 뱉었다. 아직 약속 시간까진 꽤 남았는데 그냥 집에 갈까.
[: 장난하세요?]
[OO학번 타치카와 케이: 미안 미안~ 근데 아마, 너도 마음에 들어 할 거야.]
[OO학번 타치카와 케이: (웃고 있는 떡 스탬프)]
탁, 발을 멈춘 아키요시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바람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자동차들과 버스들이 보이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과, 휴대폰을 보며 길을 걷는 사람과, 어딘가 바빠 보이는 사람. 가만히 앉아 벌써 버스를 6대 정도 보낸 아키요시만 두고 모두는 할 일을 가지고 이리저리 움직인다. 아키요시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대학을 다니고 과제도 한다. 그런데도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무언가가 존재해 항상 답답한 기분이 든다.
이 기분은 아키요시의 탓은 아닐 것이다. 이건 아마...
"왜 이렇게 빨리 왔어?"
"안녕, ...안녕하세요."
"그래. 좋은 저녁."
가게의 주차장 쪽에서 나온 타치카와와... 타치카와의 친구? 분이 아키요시에게 다가왔다. 꾸벅, 인사를 마친 아키요시는 역시 결심했을 때 그냥 집으로 갈 걸.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아쉬워했다. 타치카와의 뒤에 선 사람은 좋게 봐주면 대학원생, 아키요시의 예상에 의하면 30대 직장인처럼 보였다. 옷은 정장이 아닌 차분한 색의 가디건이었지만, 30대가 넘으면 20대와는 보이는 차이가 있으니 아마 아키요시와 타치카와 보다는 어른일 것이다. 확실히 액면가는 친구긴 한데.
"이쪽은 보더 본부장 시노다 씨. 음, 스승님이셔."
아키요시는 스승이란 단어를 육성으로 처음 들어봤지만, 어쩐지 그리 어색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이쪽은..."
"노리토 아키요시입니다. 타치카와랑은 대학교 동기네요."
"그래, 반갑다. ...시노다 마사후미, 라고 한다."
어딘가 딱딱한 인사말은, 본부장이라고 했던가. 시노다 역시 아키요시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딱딱한 인사말과는 달리 꽤 부드러운 표정을 지은 본부장이라는 사람은, 아키요시의 예상과는 다르게 또래가 아니었지만. 또한 예상과 다르게 그리 불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묘한 확신이었다.
"여긴 처음이야?"
"아마 아닐 걸...?"
"으음~ 뭐, 됐어."
타치카와가 혼자 메뉴판을 살펴보는 걸 지켜보던 아키요시는, 역시 타치카와는 멋대로 주문을 하는 편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 그러니까 시노다가 있음에도 둘에게 다른 걸 묻지 않고 주문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아키요시는 시노다가 건넨 물 잔을 받았고, 이상한 기시감을 느끼며 마신 뒤 타치카와가 주문한 메뉴를 살펴보았다. 시노다는 직원이 미리 가져다준 식기를 차분하게 가지런히 배치해 주고는, 따로 냅킨을 받아 밑에 깔아준 뒤 타치카와가 주문한 주문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 비슷한 행동을 타치카와에게서도 받았었다. 친한 것 같은데, 같은 습관을 가진 걸까. 시노다는 아키요시의 시선을 느껴 고개를 들었고, 눈이 마주쳤다.
"메뉴는 확인했니? 이걸로 괜찮을까."
"괜찮겠죠."
"그... 렇지."
조금 뜸을 들이며 대답을 마친 시노다는 얕게 미소 지은 표정으로 약간 시선을 돌렸다. 아키요시는 어쩐지 시노다가 저 웃음을 억지로 짓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보이긴 하지만, 어딘가 불편해 보였다.
아, 아니면 혹시. 아키요시의 마음이 불편한 건가.
거하게 빗나간 처음의 예상을 아키요시는 지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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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다는 차에서 내려 타치카와의 뒤를 따랐다. 조금 이르게 도착했지만, 타치카와의 말로는 아마 상대가 먼저 도착했을 거라고 한다. 반신반의하는 기분으로 길거리를 보던 시노다는, 저 멀리 시야에 담기는 정류장에 아키요시를 닮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가게 쪽으로 향하며 거리가 가까워졌고, 시노다는 설마 싶은 예상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설령 맞더라도 시노다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리고 타치카와는 아키요시에게 말을 걸었다.
시노다는 크게 웃어버리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안녕하세요."
아, 3년 전 그대로다. 아키요시만 시간을 멈추었다가, 방금 푼 건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딱 이런 날씨가 시작되었을 즈음에 시노다가 아키요시에게 처음으로 선물 해준 옷이다. 추워하면서도 따뜻한 옷을 사 입지 않는 아키요시에게 이 정도는 사서 입어도 괜찮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일부러 가지도 않는 길거리의 로드샵에서 산 비싸지 않은, 아키요시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옷. 선물한 당사자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지.
그래, 아키요시는 이제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무어라고 대답했지만 시노다는 정확히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떠올리지 못했다. 타치카와를 혼내거나, 무언가 물어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확실히 미카도는 좁다. 그렇지만 시노다는 아키요시를 다시는 마주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고, 얼추 맞는 예상이기도 했다. 시노다는 보더의 근처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일반인이 된 아키요시는 보더의 근처에 올 이유가 없으니 당연하다. 아마 잘하면 평생 동안 마주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쪽은 보더 본부장, 시노다 씨. 음, 스승님이셔."
이렇게 굳이 끌려 나와 소개받지 않았다면 말이지.
"노리토 아키요시입니다. 타치카와랑은 대학교 동기네요."
'노리토 아키요시입니다. 제자로 저를 들이셨다고요.'
'그래, 반갑다. 본부장 시노다 마사후미라고 한다.'
"그래, 반갑다. ...시노다 마사후미, 라고 한다."
시노다는 악수라도 내밀어야 할까, 약한 충동에 주먹을 세게 쥐었다. 모든 행동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시노다의 심정은 솔직히, 지금 거대한 폭탄이라도 껴안은 것 같았다. 기억이라는 건 그리 만만한 게 아냐! 키누타의 목소리가 시노다의 머릿속에서 맴돈다. 사고를 친 제자의 뒷수습을 하는 건 언제나 시노다의 몫이다.
상층부의 회의, 의제는 당연하게도 'S급 대원 노리토 아키요시의 기억 봉인 여부'이다. 키누타가 반대로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었다. 네츠키가 동의하며 사서 불안 할 요소를 만들 필요는 없다, 고 말했다. 키누타가 본인의 의견을 조금 더 보충했다. '너무 많은 기억을 봉인해 버리면 당연하지만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 개발 실장의 충고였으므로 시노다는 깍지를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시노다가 아키요시의 기억 봉인에 긍정적인 의견을 내비쳤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의 의견이다, 그런 틀에 박힌 말이다. 린도가 속으로 비웃었다. 그리고 뭐, 린도는 기억 봉인에 동의했다. 입에 문 담배를 내려놓은 카라사와는 아키요시가 희망하는 봉인 처치를 하지 않았을 경우, 보더를 나가서 고의적으로 기밀을 말할 가능성도, 아예 없지는 않다며 동의의 의견을 내비쳤다. 카라사와를 쳐다보는 시노다의 시선은 무시한 채, 카라사와는 회의를 듣기만 하던 키도를 쳐다보았다. 자연스레 시선이 모인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최고 사령관은 결정을 내렸다.
"노리토 대원의 기억은 봉인하는 것으로 하지."
키도 사령...! 걱정의 목소리가 튀어나왔지만, 한 번 입 밖으로 나온 결정을 키도가 무르는 일은 결코 없었다. "다음 의제로 넘어가겠다." 시노다는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쯧쯧, 키누타의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와 박혔지만, 시노다는 그것이 걱정과 염려임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어리지 않았다.
"시노다 군, 잠깐 이리 와 봐."
"무슨 일인가?"
복도를 한 두 번 둘러본 뒤, 시노다는 키누타가 말 없이 이동하는 보폭에 발을 맞추어 걸었다. 개발실 쪽으로 향하는 복도에서 시노다는 키누타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을 끝냈다. 뻔했으며, 뻔한 만큼 감사했고, 또 그만큼 이후의 일이 걱정되었다.
"트리온이나 인간형 네이버에 대한 기억을 조금 지운다고 큰 문제가 생기진 않아."
"네, 지금까지 그래 왔으니까."
"내가 대충 계산한 노리토의 봉인할 기억이 어느 정도라고?"
"...기간으로만 따지면 1년이 조금 안 될 정도였지."
"문제가 안 생길 것 같나?"
"그래서, 위화감을 숨길 설정도 분명..."
"온 얼굴에 걱정을 덕지덕지 붙여놓고 말은 잘하는군."
시노다는 이미 실행 일정까지 잡아 둔 '설정'을 떠올렸다. 참 무식하고 단순한 방법이라고, 그렇지만 실제로 가장 많이 일어나는 경우라고 생각했다.
"다시 보더와 엮이지 않는 이상 괜찮을 겁니다."
"하! 내 말 잘 들어."
"기억이라는 건 그리 만만한 게 아냐!"
아키요시의 시선을 느껴, 시노다는 고개를 들고 시선을 마주 보았다. 타치카와가 멋대로 주문한 것에 대해 무언가 말을 얹길 원하는 걸까. 시노다의 질문에 아키요시는 "괜찮겠죠." 가볍게 답했다. 동시에 시노다의 머릿속에 아키요시의 목소리가 겹친다. '뭐, 괜찮겠죠. 타코카와가 시킨 건데.' 그래, 키누타의 말대로 기억이라는 건,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절실히 깨달으며 시노다는 입에 경련이 나지 않게 꽉 물던 이에 힘을 풀었다. 타치카와가 자연스레 아키요시의 음식을 가져가 입에 넣으면, 아키요시는 화를 내며 젓가락으로 삿대질을 하곤 했다.
이제는 두 명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풍경이며, 아마 앞으로는 그 엇비슷한 것조차 겪지 못할 추억이다.
'최대한 봉인된 기억과 유사한 상황을 만들어선 안 돼.'
마음 같아선 미카도 밖으로 쫓아내 버리고 싶군.
시노다는 키누타의 충고를 잊지 않았다. 아키요시는, 지금 이 상황에서 위화감이나 불편함을 겪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타치카와에게 기억 봉인에 관한 세세한 얘기를 하지 않았던 일을 시노다는 드물게 후회했다. 그리고 동시에, 아키요시와의 만남을 숨기지 않고 시노다를 끌어들인 타치카와의 무책임함에 감사했다. 이제 일을 해결해야 할 시간이다.
"얼마 보내드리면 될까요?"
"응? 아냐, 괜찮아."
원래라면 가장 어린 아키요시가 계산한 뒤 연상들에게 적당히 돈을 받는 게 맞았으나, 시노다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차피 전부 자신이 계산할 텐데 귀찮게 그럴 필요는 없겠지. 이미 셋 모두가 익숙해진 일이라, 오히려 시노다는 아키요시가 그렇게 말을 꺼냈을 때 새삼스럽게 지금의 상황을 인식했다. 아무리 시노다가 타치카와와 가까운 관계여도 역시 부하의 대학 친구와 저녁 식사를 같이 하는 상사라는 건 조금 이상하지 않나.
시노다는 아키요시와 처음으로 식사를 같이 했던 때를 떠올렸다. 아직 타치카와와도 친해지지 않았던 아키요시의 18살 여름의 초입, 두 번이나 끼니를 걸렀다는 말에 저녁 9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아키요시를 데리고 보더의 식당으로 향했었다. 한산한 식당에서는 다른 누구의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시노다는 급하게 음식을 입에 구겨 넣는 아키요시를 보며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고 당시 시노다는 그것을 알 방도가 없었지만. 그렇지만, 지금은 그게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얼마였나요?'
자신이 한꺼번에 계산해버린 탓에 아키요시가 시노다에게 꺼냈던 말이다.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고, 기억 또한 쉽게 퇴색되지 않는다.
아키요시의 기억도, 아마 퇴색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튀어나오지 않게 눌러두었을 뿐이니.
아키요시가 원하던 현재의 상황을 시노다는 다시 망치고 싶지 않았다. 타치카와도 그럴 것이라고, 시노다는 믿고, 싶었다.
"케이."
"응."
아키요시가 버스를 타는 것까지 지켜본 뒤, 시노다는 타치카와를 불렀다. “너무 화내지는 마? 나도 우연찮게 만난 거고.” 시노다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길어질 것 같기도 했고 이런 사방이 뚫린 밖에서 할 얘기가 아니기도 했기에 잠시 입을 다물고 고민했다.
"화 안 내."
아키에 관해서, 너한테 해주어야 할 전달이 있으니 내일까지 아키에게 연락하지 말고 시간이 될 때 본부장실로 와. 시노다의 말에 타치카와는 느긋하게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잘 들어갔냐고는 해야 되는 거 아냐?"
"하지 마."
"재미없네."
시노다도 타치카와의 말에 마음속으로 동의했다. 이건, 별로 재미있는 상황이 아니다. 타치카와를 데려다 준 뒤, 시노다는 혼자 살기엔 넓게 느껴지는 비어버린 집에 발을 들였다. 휑 하게 느껴지는 거실을 지나 역시나 휑 한 침실의 침대에 누우니, 정말 피곤했다. 옷도 갈아입기 귀찮군. 한 사람이 견디기에 벅찬 과거의 잔재 따위는 버리고 새 출발을 한다는 선택은, 사실 시노다에게는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그렇게 느껴진다. 그렇지 않나? 지금의 시노다를 보라. 시노다는 웃고 싶은 기분이 들었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눈을 감는 것을 택했다.
저번 분기에 새로 들어온 C급 대원들의 파일을 넘기며 정보들을 머릿속에 집어넣던 시노다는 낌새 없이 벌컥, 열린 본부장실의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케이, 이젠 최소한 말이라도 걸고 들어오는 건?” 타치카와는 가볍게 흘려들으며 “노력해볼게.” 하고 답했다. 타치카와가 ‘자신의 자리’로 향해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 모습이 시노다는 어쩐지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타치카와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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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치카와는 보더의 식당에서 식권을 뽑으며 방금 전 들었던 시노다의 설명들을 대충, 짧게, 떠올렸다. 뭐라고 했더라? 기억 봉인은 완벽히 안정된 기술도 아니며, 아키요시의 경우는 특히 더 방대한 작업이었어서 위태롭다. 뭐가 위태롭냐 하면, 봉인된 기억과 관련된, 유사한 상황을 다시 경험하거나 정보를 떠올리게 되면 강한 거부감과 불쾌함을 느끼고, 아마도 뇌 어쩌고 세포가 죽고, 혼란을 겪고, 망가질 수도 있고? 기억 봉인이 풀릴 수도 있고. 아무튼 길었던 얘기였다. 타치카와는 전부 납득했다. 어쩌면 타치카와가 아키요시와 '다시' 친해지는 걸 고민한 것도 어렴풋이 이럴 것 같다고 생각해서 그런 걸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막 튀겨 뜨거운 고로케를 천천히 먹으면서, 타치카와는 시노다의 부탁을 떠올렸다. '네가 판단하고 결정할 행동을 내가 감시하고 막을 권리 따위는 당연히 없다. 그것은 케이 네 선택이고, 나는 간섭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야.' 잔잔히, 그리고 단호한 말투는 익숙한 스승, 상사의 그것이다. '그렇지만, 난... 케이 네가 아키를 너무 자주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타치카와는 유약한 시노다를 바라보았다. 아키요시의 정신이 무너질 수도 있는 일에, '명령' 정도는 해도 될 텐데.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아도 타치카와는 아마 흥미가 주욱, 떨어졌을 것이다.
'케이, 괜찮니?'
아키요시에 대한 얘기를 해 준다길래 찾아간 본부장실에서 잔소리 다음으로 들은 말이다. 길지도 않았던 스승의 역할을 계속해야 하는 것도 참 힘든 일이네, 싶었다. 타치카와는 불어버린 우동의 면을 살짝 휘저었다. 기억을 잃은 그녀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러브 스토리의 부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정도일 것이다. 물컵에 든 물을 마셨으나, 확실히 미지근했다. 맛없어.
타치카와는 더이상 '우연찮게 대학에서 마주치기'를 하지 않았다. 그 놀이는 끝났고, 다시 여느 때처럼 대학에 가지 않으며 대원들이 가진 특혜로 학점 대체 필수 레포트를 간간히 제출했다. 졸업해야지~ 그럼. 연락처에서 아키요시의 주소록을 삭제했는데, 앞으로 연락하지 않을 예정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키요시는 아키요시 답게도 타치카와에게 먼저 연락하는 일이 없었다. 뭐, 그렇게 까지 친해진 것도 아니었으니까. 타치카와는 포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음. 이건 포기가 아니라 마음 아픈 강제 이별 같은 건가? 마음 아픈 선택적 이별?
러닝을 뛰던 타치카와는 살포시 제 볼에 떨어진 차가운 눈송이를 닦아내며,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벌써 눈이 내리나. 지금이 몇 월 달이지. 타치카와는 얼마 전에 크리스마스를 맞아 동갑 몇 명과 후배, 어쩌면 선배가 있었던가. 정도와 파티를 했던 걸 떠올렸다. 중간부터 필름이 끊겨서 그다지 많은 기억은 나지 않는군. 어쨌든 12월이 거의 다 지나갔고, 곧 신년이다. 그래, 신년 좋지. 새로운 마음 가짐을 가지는 건 멋진 일이다. 타치카와는 당연하게도 매년 새로운 마음 가짐을 다잡는다. 진과의 일대일에서 8할 정도 점수 앞선채로 승리하기, 7할 까지는 운 좋게-운도 실력이다- 달성한 적이 있었는데 8할은 아직 해본 적이 없다. 팀 랭크전에서 니노미야네랑 붙었을 때 니노미야를 제일 먼저 베일 아웃시키기. 은근히 어렵다 이거. 시노다 씨가 만약 내년에 시간이 생겨 상대해 준다면 무승부 이상을 노려보기. 타치카와의 자신감으로만 따진다면 이길 것도 같은데, 애초에 자주 볼 수 있는 얼굴이 아니라서.
음, 그리고 다가오는 중요 일정도 하나 있네.
타치카와가 후우, 내뱉은 숨이 흰 입김이 되어 공중으로 흩어진다. 그다지 애틋한 관계는 아니었으나, 타치카와는 계절이 바뀌고 온도가 떨어져 날씨가 추워지면 어쩐지 아키요시가 떠올랐다. 코가 빨개져선 춥다며 타치카와의 목도리를 빼앗던 때가 그리운 걸지도 모르지. 누군가가 깊은 관계였냐고 물으면, 그런 건 아니다. 그렇다면 얕은 관계였나? 그건, 또 그렇지도 않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동안 함께 보낸 시간들은 확실히 즐거웠다. 어떤 만남과 기억들은, 길진 않더라도 너무나 거대한 파급력을 남기기도 한다. 타치카와의 경우는 거대하진 않았고, 거대할 거라고 추측되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 아키요시가 조금 도려간 타치카와의 조각은, 아키요시가 멋대로 모양을 바꿔 놓고는 멋대로 버리고 도망가서. 다시 주워서 끼우려고 해 봐도 맞질 않았다. 그래서 타치카와도 버려버렸다. 불쌍한 조각.
사실 그닥 불쌍하진 않지만.
"올해도 루카랑 기타 등등과 신사 가기로 했어?"
"기타 등등이라고 뭉뚱그리지 마."
가기로 했지, 그건 왜. 곧 신년인 것과 관계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복작거리는 보더에 이리저리 바쁜 본부장, 시노다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도 끼워주라." 타치카와의 말에 시노다가 의외라는 듯이 타치카와를 바라보았다.
"넌 원래 가족이나 친구와 갔었지?"
"연휴는 길잖아~"
"괜찮겠어? 올해도 1월 1일에 갈 예정이다만."
"음, 그건 조금 곤란할지도."
시노다 씨네가 3일 정도 미루면 안 돼? 안 되지. 타치카와는 고민 끝에 자신이 양보하기로 했다. 아마 말로 했으면 혼났을 것이다. 아~ 연휴 일정이 참 빡빡했다. 일정의 절반 정도는 연휴를 맞아 텅텅 빈 방위 임무 시프트에 타치카와가 자신의 이름을 잔뜩 올렸기 때문이지만. 연휴를 같이 보내자는 연락은 물론 평범하게 많이 오는 편이다. 타치카와의 착각이라면 부끄럽겠네. 노는 것은 즐겁지만 방위 임무도 그럭저럭 시간을 보내기엔 좋고, 무엇보다 이렇게 방위 임무가 비어버리면 그 몫은 시노다, 진, 다른 책임감 넘치는 녀석들 정도가 전부 떠안는다. 연휴를 맞아 용돈 벌이를 하자고 장난스레 얘기하면 피식 웃으며 같이 시프트를 짜주던 아키요시도 그랬었지.
타치카와는 평소보다 활기를 띄는 미카도의 거리를 지나 약속했던 신사로 향했다. 해가 저문지도 꽤 됐는데 여전히 길거리에 사람이 많네. 신년 분위기가 가득한 풍경은 어딘가 모르게 사람을 들뜨게 만든다. 1월 1일이라는 날짜는 1년 주기로 돌아오는 다른 날들과 다를 바가 없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아키요시와 보낸 1월 1일은 단 한 번, 그날을 같이 보낸 것도 아니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렇다.
"여전히 낭만 없는 정장."
"케이 너도 나와 다른 점을 찾을 수 없지만."
단정한 기모노를 차려입은 루카의 옆에 비슷한 무늬의 역시나 기모노 차림의 요타로, 옆의 재미 없는 아저씨 둘. 타치카와가 왔으니 이제 재미 없는 아저씨 셋이다. 근황 얘기와 신년 얘기, 보더 얘기를 하며 주변을 빙빙 돌다, 너무 늦기 전에 한산해진 신사로 향했다. 루카와 요타로가 참배를 하는 걸 쳐다보는데, 타치카와는 네이버가 참배해도 저거 효과 있나?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이것도 말로 했으면 혼났을 것이다. 재미 없는 아저씨 셋도 참배를 했다. 타치카와는 익숙한 동작을 마친 뒤, 먼저 감사 인사를 올렸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그리고 은근슬쩍 원하는 것도 빌었다. 타치카와는 감히 제 감사 인사를 받았으면 이 정도는 들어 달라고 요구하는 뻔뻔한 인간상이다.
"타치카와 너, 감사 인사를 그렇게 길게 했을 리는 없고. 소원 같은 거 빌었지?"
"응."
"네가 어린애냐."
시노다의 허탈한 목소리에 타치카와와 린도는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가만히 지켜보던 루카가 '소원을 빌면 안 되는 거였나요?!' 하며 뒤늦게 부끄러워했기 때문에 그것 또한 재밌었다. 쿠지에서 당당하게 대길을 뽑은 타치카와는 당연한 결과라며 웃은 다음, 대흉을 뽑아 슬퍼하던 요타로를 놀렸다가 두 명에게 두 번 맞았다. 눈물 젖은 쿠지를 들고 꼬물거리던 요타로를 몰래 불러 비밀이라며 은근슬쩍 쿠지를 바꿔주고, 축축한 쿠지는 아무도 모르게 구겨서 바닥에 버렸다. 타마코마에 놀러오면 코나미의 간식을 준다는 요타로의 말은 확실히 솔깃했지만, 타치카와는 타마코마에 놀러 가진 않을 것이다. 다시 암살 임무라도 들어오면 혹시 모르지만.
"케이, 무엇을 빌었는지 물어도 괜찮을까."
"뭐야 그 쓸데없이 빙빙 돌려 묻는 화법은?"
"무슨 꿍꿍이인지 바른대로 털어놓도록."
"시노다 씨는 뭔 꿍꿍이를 빌었는데?"
"뭐, 여러 가지."
"그래~"
타치카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미러로 자신을 노려보는 시노다 대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이건 글렀군. 타치카와의 집 앞에 도착해, 제 옆구리에 기대 잠을 자던 요타로를 루카 쪽으로 슬며시 치운 뒤 차에서 내린 타치카와는 역시 자차는 편하네, 나도 면허를 따 볼까. 아마 원해봤자 이루어지지 않을 헛생각을 품고 운전석 쪽의 창문을 툭툭, 건드렸다. "왜." 스르륵 창문이 내려가고 타치카와는 대학을 1년 휴학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내 졸업식에 와. 이걸 빌었거든."
시노다는 퍽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 거짓말하지 그래."
"이럴 땐 피식, 스승의 웃음을 지으며 비좁은 창문 밖으로 손을 뻗어서 머리를 쓰다듬고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라고 해야지."
"케이 제발 드라마 좀 그만 봐."
"응."
좀처럼 거짓말에 넘어가 주지 않는 시노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출발한 자동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타치카와는 자신의 아버지가 어떤 색의 넥타이를 선물해 준다고 했더라? 천천히 기억을 되짚었다. 아마 감색이었나. 회색... 은 역시 칙칙하니 보라색은 어떨까 물어봐야겠다. 아마 재미있을 졸업식을 상상하며 타치카와는 휴대폰의 달력에 졸업식 날짜를 체크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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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요시는 긴 연휴를 맞아 집에 누워... 있고 싶었었다. 1일에서 2일 사이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친구가 많았기에 누워 있을 수 있었으나, 3일 째부터 7일까지 아키요시는 친구들에게 불려 나가 신년의 분위기를 강제로 흡수하고 신사를 걸어 다니고 참배도 4번이나 해야 했다. 귀찮다면 귀찮고 힘들다면 힘들기도 했지만.
"노리토! 너 길 뽑은 거야? 부럽다~"
"봐봐, 기모노 대여해서 입길 잘했지? 엄청 어울리잖아."
그렇지만 역시 즐거웠다. 아키요시는 약하게 웃으며 쿠지를 자랑하듯 흔들었다. 찰칵, 신사를 배경으로 다 같이 사진을 찍고, 아키요시는 바꾼 적 없었던 휴대폰의 기본 배경화면을 변경했다. 아키요시는 지금까지 항상 일상을 살아왔음에도, 왜인지 이제서야 일상을 보낸다는 감각이 들었다. 이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아니지. 이건 아키요시에게 행복하게 다가왔으며 동시에 안정감을 주었다.
막 친해진 것 같은데, 벌써 졸업하는 게 아쉬울 정도다. 미카도는 좁기 때문에 시 밖으로 떠나지 않으면 생각보다는 자주 만날 테니 슬플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키요시는 졸업식 때 대여해서 입을 하카마를 미리 정해두자며 빠르게 약속을 잡아두는, 아키요시 보다 퍽 작은 키의 친구에게 알았다며 웃어주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무슨 색이 좋아?" 친구의 물음에 아키요시는 잠시 고민했다. "글쎄, 짙은 남색이나 흰색? 그러면 포인트는 붉은색이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흰색은 좀 그렇다! 포인트까지 붉은색이면 완전 신부 옷이잖아. 친구의 말에 아키요시는 아, 그렇네? 뒤늦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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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축하한다."
이제 졸업생의 마음 가짐을 가지고 철 좀 들어.
타치카와는 이어진 말은 가볍게 흘려들으며 시노다가 건네는 수수한 꽃다발을 영차, 품에 안았다. 부모님이 준 거대한 꽃다발과 먼저 졸업한 녀석들이 잔뜩 건네준 자잘한 꽃다발'들'... 어휴. 보통 가족만 챙겨주지 이런 건? 보더에서 매일 얼굴을 보는 동기 같은 대학 선배들은 타치카와를 놀리기 위해 굳이 꽃다발을 챙겨주었다. 타치카와는 기쁜 마음으로 웃으며 받았고, 보답으로 꽃다발로 한 번씩 머리를 눌러주었다. 시노다가 큰 종이 봉투를 준비해 주었기 때문에 타치카와는 거기에 꽃다발을 우수수 내려놓았다. 대충 범인 → 스와 → 마작 모임 → 아즈마 → 사와무라 → 시노다 정도의 정보 전달이 있었다고 한다. 음, 별로 궁금하진 않았다. 편하고 좋네.
"졸업 축하해!"
"너도, 졸업 축하해."
"졸업은 좋은데 졸업식은 너무 아쉽다."
"그게 뭐야?"
"몰라."
"오, 졸업 축하한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친구와, 친구의 가족과, 다시 친구, 친구 가족. 아키요시가 갑작스럽게 인기인이 되어 친구가 우수수 생긴 것은 아니라 적당히 도란도란한 분위기가 이어졌고, 적당히 사진을 찍고 인사를 나누며 돌아다녔다. 다만 아키요시는 대학 밖의 친구는 없어 텅 빈 손이긴 했다.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고 아키요시도 신경 쓰지 않았다. 편하고 좋잖아.
자신이 알던 분위기가 아니었지만, 바뀐 분위기에도 타치카와는 한 번에 아키요시의 뒷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시노다는 타치카와에게 꽃다발 봉투를 건넸지만, 타치카와는 어딘가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시노다를 지나쳐 훌쩍 걸어가기 시작했다. 뒤를 돌았고, 시노다는 두 가지를 알게 되었다.
왜 대학생에게만 의미 있을 이별의 장소에 타치카와가 자신을 불렀나 했더니. 타치카와 속 '우리'의 이별에 시노다도 포함시켜 준 건 배려겠지. 고맙지만, 시노다가 받을 리가 없다.
타치카와가 향한 반대 방향, 시노다의 자차로 시노다는 향했다. 종이 봉투는 결국 또 자신이 챙겨야 한다.
타치카와는 불쌍한 타치카와의 조각을 주워 들었다. 어차피 버릴 거라면 자신의 눈앞에 두는 건 사절이다.
아키요시는 연락하지 않은지 꽤 지난 선배... 가 아닌 동기, 타치카와가 아키요시에게 천천히 걸어오는 걸 발견했다. 졸업 축하해? 졸업 축하드려요? 아키요시의 내적에서 약간 거리감이 생겼으니 존댓말을 써야 할까.
시노다는 차에 비스듬히 기대 타치카와를 기다렸다. 어차피 둘 다 바로 보더에 갈 예정인 걸, 둘 다 알고 있다.
그리고 시노다의 기대와는 달리 다른 제자가 시노다에게 온다. 방금 본 것과는 달리 표정이 좋지 않다. 불편한 표정이다.
타치카와는 "졸업 축하드려요." 움직이는 아키요시의 입 모양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대답해주었다.
시노다는 "할 말이 있지 않나요." 묻는 아키요시를 마주 보았다. 그래, 있었다.
"이 말을 해주고 싶었어."
아키요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왜?
이해하면 안 된다는 이상한 감각에 휩싸였다.
그게 아키요시는 더욱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를 잊지 마, 아키요시. 절대."
"앞으로도 너만을 위한 선택을 해. 영원의 행운을 빌어줄 테니."
보더를 졸업한 아키요시로부터,
둘의,
졸업이다.
卒業
1. 졸업. (↔入学)
2. 어떤 예정된 일을 끝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