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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네일 하라삐 님 커미션.

#만검 동반자

검제군의 원작 서사? 사실 이 캐릭터로 드림을 한다는 거 자체로 이미 죽사헌의 스포일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네.

약 11,800자. 서사+일상(아마)

 

 


 

 

“그럼, 제 집에서 지내세요.”

“뭐?”

 

검제는 다시 그들의 상황을 되돌아보았다. 이거 내 탓이냐?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그러니까….

 

 

-

 

 

검제는 99층에서 내려온 뒤 먼저 살아 있는 인연들을 챙겼다. 하나의 증명을 위해 탑 밑에 두고 온 제 인연들. 검제가 처음으로 찾아간 건 가장 근처, 등천도시에 입주한 레이였으며 맨 나중에 다시 찾아간 사람 또한 레이였다.

 

아니 근데, 진짜로. 레알. 쟬 도저히 가만 내버려 둘 수가 있어야지. 장로가 인정한 저 또라이는 자신을… 검제를 160년 넘게 기다렸단다. 그 곰팡내 나는 50층에서 세월에 정신이 마모되어가며, 신체는 마탑에게 깎여 나갔댔나? 여튼 정신머리가 똑바로 박혀있지 않은 게 분명했다. 하긴. 그게 이령이지.

 

고작 시야를 틔워주었다고 저를 갓 태어난 오리 새끼처럼 따르던 애였다만. 무려 눈을 잃는 과정을 동반한 채 150년 동안 이어질 줄 알았겠나…. 아무리 저라도…. 그래…. 그걸… 자신이 정말 예상치 못했던가?

실은 기다려주길 바랐던 거 아니야?

어찌 됐든 중요한 건 ‘이령이 자신에게 맞춰진’ 부분이었다. 탑에서 부여한 레이의 스킬은 레이가 삼은 세상에 그의 시계를 고정해 버리는 것. 좌우간 탑주도 취향이 이상했다.

 

당신을 쭉 따를 거라고 하였지. 검제가 앞서 걸으면 그 뒤에서 항상 자리를 지키겠다는 말, 레이는 약속을 지켰다.

검제는 죽음과 다름없는 상태였으니 레이가 그의 지난 세월을 알 방도는 없었고, 반대로 레이의 지난 세월을 검제가 알 방도도 없었다. 그러나 탑이 레이의 기다림을 증명했다. 그 결과라는 게 검제가 죽고 나서야 레이의 시간이 흐르는 거라니.

 

“그게 신경 안 쓰이고 배겨?!”

“예?”

 

레이가 흘깃 검제를 노려보다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리 무거운 돌을 발목에 묶고 어떻게 다녀야 하나. 레이의 외알 안경을 괜히 손가락으로 건드니 작은 손이 그를 팩, 내쳤다.

 

“어떤 존재도 당신을 붙잡아 둘 수 없어요. 탑주조차도. 당신이 그걸 가능케 했고, 전 있어 달라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왜 제게 성질내시나요?”

 

검제는 머무름이나 정착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살아온 내내 멈추지 않고 죽어라 달리기만 했으니 모두가 아는 사실과도 부합했다. 그걸 잠시 쉬어 가겠다며, 등천도시에서 니네들이랑 좀 놀 거라 선언한 게 검제였지. 제자보단 라이벌에 가까워진 공자와 걔 식구들이랑 인사도 해야 하고, 마르쿠스랑 술도 마시고, 회색이도 놀려 주어야 하고, 이령이랑 노는 시간도 가져야 했다.

 

그 선언에 레이가 물었다.

 

“아예 한동안 지내는 거라면 주무실 곳은 있으신가요?”

“생각 안 해놨는데? 그냥 사자세계 가서 집 짓고 살아도 되고.”

“휴우….”

“뭣하면 공자한테….”

“그럼, 제 집에서 지내세요.”

“뭐?”

 

제가 제작계의 거물? 뭐 그런 거라 돈 많아서요. 거주지도 넓답니다. 200년 가까이 장사하며 살았는데 돈이 없는 게 더 이상하겠지요. 검제는 완전히 이해했다. 그건 그랬다.

 

“근데 그거랑 네 집에서 사는 거랑 뭔 상관?”

“배려해드린다는데 좀 얌전히 받으시면 안 될까요? 방 내어드릴 테니 길바닥에 노숙하지 말고 베개에 머리 박고 주무시라고요.”

“어… 그래… 알았다….”

 

같이 산다는 건 통상적인 인간들과 검제에겐 친밀함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좋으나 싫으나 서로에 대해 알아간다는 건 관계 발전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인간 사회와 거리감이 먼 레이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으려나.

 

기세에 밀려 수락했지만 괜찮겠지.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물리적으로 혹은 흔한 의미로든 사고 치지 않을 위인이었다. 검제는 오케이! 대답하며 레이의 등을 팡팡 쳐주었던 거 같다.

 

 

-

 

 

검제는 지금 여러 가지를 후회 중이다.

 

같이 안 살았으면 이러지도 않았을 텐데. 머릿속의 무언가가 코웃음 쳤다. 정말 그랬을까? 어. 그랬을 거다, 옘병.

 

대치하듯 팔짱 낀 검제와 달리 레이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저거 사회성을 키워줘야 했는데. 아아아아악!

 

동거하고 퍽 지난, 후회하긴 약간 늦은 시점이었다.

 

 

-

 

 

레이는 앞으로 한동안 머물 투숙객에게 방을 보여주었다. “삭막하네.” 들리는 말은 무시했다.

 

언제 들리셔도 상관없어요. 아침이든 저녁이든 새벽이든. 제가 있든 없든. 오고 싶을 때 오고, 가고 싶을 때 가세요. 몸 누일 곳이 필요할 때만 왔다가 가도 괜찮겠지요. 여기가 당신의 방, 이곳은 저의 침실, 거실, 부엌, 화장실…. 잡다한 설명은 금방 끊겼다. 그다지 설명할 게 없었으니 당연했다.

 

정을 들이지 않았고 앞으로도 생길 일 없는 단순한 주거지였다. 레이는 연구실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길기도 했으니. 먹지 않거나 잠들지 않아도 괜찮은 몸뚱어리란 편리도 하지. 검제는 방을 대충 훑어보더니 그다지 든 건 없는 냉장고를 살피고 있었다.

 

“이령아. 내일 장 보러 가자.”

“….”

“일찍 일어나라.”

“가는 건 당신 마음이지만, 굳이 저도 가야 하나요?”

“엉.”

 

검제가 안 해도 되는 요리를 해주겠다며 불필요하게도 떵떵거렸다. 그게 즐거워 보여서 레이는 그가 즐거워하게 두었다…. 함께 무언가 한다는 건 기쁜 일이 아니던가. 예전엔 수련도 하였고 밥도 같이 먹었던 때가 있었지. 검제가 산책하고 싶다면 같이 나가주는 게 좋겠다. 장보기와 밥 먹기를 약속한 뒤 레이는 검제가 내킬 때 저를 부르라고 전했다.

 

안 자고 있을 테니 언제든 부르세요. 그 말에 검제가 펄쩍! 뛴 게 웃기긴 웃겼다. 이이령아아? 너 잠 아예 안 자고 그런 거 아니지이이?! 무척 시끄럽기도 했지만. 네가 그러니까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던가? 그건 검제도 마찬가지 아니신가…. 레이는 아니요. 하고 대답했다. 자고 싶을 땐 마음껏 잔다고, 충분히 넘치게 잠들어 뇌에게도 휴식을 준다고. 검제가 고개를 비스듬히 까딱였다.

 

“그럼 오늘 나랑 같은 시각에 자.”

 

레이는 검제와 서로 따져가며 말꼬리 잡아 기력과 감정을 소모하기 싫었다. 그렇게 시간을 버리기엔 지나치게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가 제안한 게 몇 시간 누울 뿐인 사소한 일이라 그리 어렵지 않기도 했다.

 

“예. 그럴게요.”

 

너의 그 성좌스러운 끔찍한 생활 패턴을 내 아주 단단히 고쳐주마. 검제는 그리 툴툴거렸다. 그리고 그는 온종일 실존하는 몸이 신기하다며 레이를 몇 번 건드리고, 제 소지품이나 물약을 구경하고, 그가 스킬일 시절 만난 인연들 얘기도 해주며 하루를 보냈다. 이후 칼같이 오후 10시에 잔다며 방에 들어갔다. 참….

 

레이는 잘 생각이 없었지만, 순순히 침대에 들어가 눈을 감았다. 그러자 실속 없는 생각들이 둥실 떠올라 방 안을 장식했다. 그건 실제라도 하듯 각각의 무게를 지닌 채 떠다녔다. 비록 먼지처럼 가벼우나 레이의 작은 현실감에 장식될 정도는 됐다.

 

등천도시에 오고 나서 변한 게 몇 가지 있다. 거주지를 누군가 파괴할까 24시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아도 괜찮았다. 돌아다니다가 오러 지짐을 받거나 습격을 당하거나 느닷없이 팔다리가 잘리지 않았다. 길거리의 타인들이 밝게 웃는 걸 흔히 볼 수 있었다. 매번 남을 죽이기 위해 궁리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곳은 질서가 잡혀있을 뿐 유토피아는 아니니 항상 그럴 순 없었지만, 대체로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움직이는 세상을 따라가다 보니 들어온 활기찬 도시. 따지자면 이 도시 또한 검제가 저에게 준 장소이리라.

 

그리고 세상이…. 그러니까 움직이는 검제가 슬금슬금 이동했다. 뭐냐면 지금, 현재. 레이에게 자라고 잔소리한 당사자가 어슬렁거리며 제 방에 들어왔다는 말이다. 그는 소리 없이 침대 옆 바닥에 앉아왔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기만 했다.

 

검제 또한 그의 방에 사념을 띄웠을까? 탑의 끝을 보았으니 그 흥분이 가시질 않았다거나. 너무 오랜만에 속세로 내려와 마음이 부풀어 잠이 안 온다거나. 많은 이들에게 죄책감을 지녀 생각이 무거워졌을 수도 있고. 레이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검제는 그저, 말 그대로 잠들 수 없는 걸 테다. 기나긴 날이 흐르는 내내 잠자는 행위를 하지 않았는데 하루 만에 적응해서 컨디션이고 뭐고 잠들면, 그건 병이지.

 

세계의 그 누가 저희를 평범한 인간으로 생각할까. 살아온 세월만 수백 년. 세운 업적은 탑 곳곳에 뿌리내렸고 층을 오르니 격이 쌓여 성좌가 된 존재들. 그런데도 레이는 검제를 사람이라 불렀다. 사람으로 대한다. 검제는 그런 레이를 긍정하니 윈-윈인 얘기였다. 사람인 그는 숨 소리도 내지 않고 저를 확인하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레이는 눈을 떴다. 무척이나 무의미한 행동이었는데, 외알 안경을 벗어 두어서 시야가 캄캄했다. 그렇지만 고개를 돌려 검제를 보았다. 우리는 분명 눈을 마주하고 있을 테지. 검제는 제가 일어났음에도 놀라지 않았다. 그는 계속 침묵하다, 레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자 입을 열었다.

 

“고맙다, 이령아.”

“….”

“돌아와서 너한테 이 말도 안 했지 뭐냐. 멍청하게.”

“….”

“고마워.”

 

무엇에 대한 고마움인지 궁금해할 필요도 없었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여러 감정이 있겠지만 거기서 검제가 입 밖으로 꺼낸 게 고마움임이 중요했다.

 

“오늘 귀환했는데, 넌 나한테 ‘내 방’을 내어줬어. 지낼지 아닐지도 모르는 자식 방을 준비해줘서 또 고맙다.”

“별거 아닌 일을요. 저도 당신께 인사를 안 드렸었지요.”

“….”

“감사해요.”

 

왜 이리 더럽게 오래 걸렸냐 탓하는 대신 돌아와 주어 고맙다고 하였다. 왜 나를 내치고 올랐냐 미워하는 대신 살아있는 자체에 고맙다 한다. 고작 신념 따위에 고향도 인연도 잃어버렸냐 조롱하는 대신 신뢰해 주어 고맙다고.

 

검제의 손이 레이의 뺨에 닿았다. 불타듯 뜨거운 게 눈가 아래를 쓸었으나 눈물은 묻어나지 않았다. 다 헤져 버린 주머니에 다시 눈물이 채워지려면 지나버린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눈물 외에도 삶의 요소란 건 많고 많았다. 레이는 지쳐서 많은 주머니를 들고 있을 수 없으니 회복될 동안은 나머지를 바닥에 버려둘 예정이다. 제가 유일하게 손에 든 건 탑이 준 시간. 그러니까, 수명. 시간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검제는 레이가 저처럼 해낼 수 있을 걸 믿었다. 레이는 노력했고 시간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걸 검제에게 바친다고 말한다.

 

이령은 그렇게 살기로 방침을 정했다.

다른 누군가도 그리 살 수 있겠지.

검제 또한 그리 살아갈 수야 있었다.

수많은 이가 가능할 힘듦의 무게.

 

검제는 목이 막히는 감각을 느꼈다. 아, 무거웠다.

 

“우리는 급하게 굴지 않아도 돼요.”

“….”

“검제, 당신이 원한다면 앞으로도 같은 시간에 밤에 누울 거고.”

“응.”

“그리하다 보면 잠드는 날도 늘겠죠.”

“그래.”

“왜 이런 별거 아닌 일에 슬퍼하시나요?”

“….”

 

검제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레이는 그가 슬퍼함을 느꼈다. 느껴졌다. 가만히 기다려도 그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막연히 이유를 유추하려 했는데… 어쩐지 피곤해져서 그만두었다.

 

알게 되는 건 더 나중이다.

 

 

-

 

 

검성이나 공자와 함께했었기에 검제는 등천도시에 빠르게 적응했다. 사실 적응할 게 없었지. 이미 익숙한 곳이니까.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는 하고픈 걸 차근히 했다. 만날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가볍고 평온하기에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강자들과 틈틈이 비무도 한 판씩 뛰었다.

 

레이와 검제는 평균적인 식사 시간에 식사하거나 현대 복식을 걸친 채 길거리를 걸어 다녔다.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 아이 쇼핑을 했던가. 또 새벽이 되기 전에 각자의 방에서 눈을 감았다. 레이가 잠들고 27시간이 지나도 깨지 않아 검제가 염려했고, 그 뒤로 인간 알람이 시작되어 레이는 막막한 감정에 휩싸였었다. 언제였지? 검제가 꿈을 꾼 날엔 요란을 피워댔다. 지구에서 수입해온 영화가 개봉하는 날에 다른 이들과 영화도 보았고, 성기사의 뮤지컬도 보러 갔다. 장로의 일자리에 찾아가 진상짓 해준 뒤 레이의 책임이 된 업보 처리를 검제가 지켜보기도 했었지.

 

레이는 검제가 단 걸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검제는 레이가 연금술로 무언가 제조할 때 나오는 버릇을 알게 되었다. 서로가 하품하는 흉한 꼴이 눈에 익었다. 검제는 타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익숙해졌다. 레이는 등천도시, 지구의 농담을 몇 개인가 습득했다. 검제는… 레이는….

 

기억 속 이령의 모습보다 훨 편한 표정과 말투로, 레이는 등천도시의 나날을 한가로이 보냈다. “나랑 있으니까 좋냐? 그치, 내가 머물러서 좋겠지.” 언젠가 검제가 그리 말하자 레이가 말했었다. “나쁘진 않네요.” 그리고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언제든 원하실 때 떠나도 괜찮아요.” 많은 게 함축된 말이었다.

 

검제는 이 탑에서 유일하게도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물론 레이는 이 탑의 세계를 떠나지 못한다. 검제에게 있어 정든 인연이 많으니 나가더라도 가끔은 들리겠지만, 레이는 그가 온전히 떠나버려도 괜찮다는 말을 입에 올린다. 홀로 증명함으로써 자신을 긍정하게 된 검제는 목표를 이뤘다. 이제 누군가와 동행하며 다니는 목표를 세워도 좋았다. 레이는 그 동행이 자신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말한다.

 

그는 누구와 비교해도 눈썰미가 뛰어난 편이었다. 이런 곳에서 눈치 없는 인간도 아니며, 미숙함과는 더욱 거리가 먼 자였다.

 

이령이는 욕심내지 않고 있는 거다. 욕심 가질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는단 말이 맞을까?

 

검제는 노올랍게도. 그게 무척이나. 몹시. 배알이 꼴렸다. 그래! 존나게 마음에 안 든다고. 그냥 좀. 아아, 위대한 업적을 해낸 검제 님이시여. 헌터란 존재는 원래 탑 밖으로 나돌지 못하니 탑 안의 많은 세계를 산책하실 땐 저와 다니는 게 어떠합니까. 제 어둡고 고여버린 낡은 사고방식을 햇볕에 태우려 하는데, 여러 세계를 돌아다니는 게 딱 좋겠지요. 혼자 다니기엔 무슨 불상사가 생길지 모르니 저의 동행자가 되어주시렵니까아. 뭐 이렇게 말하면 어디 덧나나?

 

검제는 기나긴 헛소리를 마친 뒤 옆에 앉아 있는 레이의 볼을 툭툭 쳤다. 그 즉시 뚱한 표정이 되었다. 재밌군. 그 손을 내리기 위해 레이의 손이 검제의 손가락에 걸쳐졌다. 의미 없이 버티던 검제가 방향을 바꿔 레이의 손을 눌러 잡았다. 백색의 눈동자가 그에게 닿았다 멀어진다. 일련의 상황은 꽤 즐거웠다.

 

이런 표현을 이령이 좋아하진 않겠으나 이령이는 몸집이 작고 무르다. 거의 모든 부분이 검제의 한 손에 들어오는 게 묘했다. 잡히는 여체가 부드러워 좋았고, 어딘가 푸른 향이 감돌며 미지근한 온기가 느껴지는 부분이 좋았다.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닿는 건 흥미….

 

…잠깐. 이런 미친! 나도 누구 못지않게 지랄맞은 편인가. 이건 빼도 박도 못하게 욕망이다. 왜 레이가 욕심 없는 게 그리 꼽나 했더니 검제가 욕심을 가져서였다. 아니근데. 이게 저만의 탓이냐? 레이의 과실도 있지 않나. 검제의 억울함을 토로하자면, 다른 이에겐 3m 이내의 접근도 불쾌해하는 레이가 그에겐 쉽게 안겨주었다. 포옹에 귀찮은 티는 내지만, 어쨌든 봐주긴 하니까. 레이는 지나가던 개가 보아도 스킨십을 선호하지 않는 자식이라 특별 취급이라면 특별 취급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검제는 벌떡 일어나 공중에 뻥, 헛발질을 했다. 아오~! 허공에 소리도 쳐주고. 생쇼가 따로 없지. 그걸 앉아서 지켜보던 레이는 그러려니… 하는 표정을 한 채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한곳에 오래 머무르더니 실성하셨나….

 

누군가를 좋아하는 거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아 짝사랑이라 짜증 내는 거야?! 아니, 그런 문제도 아니다. 그리고 검제가 보기에 레이는 그를 좋아했다. 비슷한 마음가짐으로. 그러니 문제는 상대가 전혀 욕심을 가지지 않은 자식이라는 점이겠지.

 

여기 쉬운 예를 한번 보자.

 

“음….”

검제가 턱을 짚은 채로 눈동자만 데굴, 굴렸다. 레이는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으음…~”

반대쪽으로 또 데굴. 고개도 같이 기울었다. 레이는 그제야 검제를 바라보았다. 왜 여기까지 와서 뭐 마려운 새끼 개처럼 구시나요? 레이의 질문을 무시한 검제는 새 질문을 입에 올렸다.

 

“이령아. 네가 내게 가진 감정들이 어떤 종류인지 너는 알고 있냐?”

 

레이는 그 질문에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내가 당신을, 어떤 식으로? 그건 길게 고민할 거리가 아니었다. “먼 옛날이었다면 동경, 어쩌면 숭배.” 검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탑에 들어간 이후로는….

 

“거대한 그리움. 또 막연하게 신뢰하고 있었지요. 당신은 저에게 특별하니 편애하며 의존하고 있다는 자각이 있어요. 고칠 생각은 없고요. 가장 큰 건 편안함이 아닐까요?”

 

레이는 그렇게 의문문으로 문장을 마무리했다. 눈앞의 남자는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무척 막막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쩌라는 거지.

 

“넌 어떻게 감정을 표현하라 했더니 네 마음을 서류처럼 찍어내듯 평가를 하냐….”

“이걸 원한 게 아니었나요? …당신 말은 꼭, 단순히 좋아한다고 하길 바란 거로 들리기도 해요.”

“틀렸어. 자만한 건 여전하고.”

“그럼 로맨스 드라마처럼 대답해 드릴까요? 저에겐 평생 당신밖에 없을 거예요…. 아니, 아마 한 명 더 있겠지만. 무튼 검제 당신의 뒤에선 마치 태양처럼 후광이 번쩍이고….”

“야! 됐어!!! 에휴, 내가 얘랑 뭘 하겠냐.”

 

검제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때, 검제는 후회했다. 아… 같이 살자고 할 때 거절할걸. 좋아하는 사람에게 가까워지기 쉬운 지리적 이점? 뭐? 상대방에 대해 알아가? 이런 식으로 공자에게 조언했던 시절이 있었지. 멍청아, 멍청한 김검제야…. 답 없는 상대방을 보자니 참 막막했다. 말처럼 쉽지를 않았다.

 

“원하는 답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그렇게 해서 들은 말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

“기분 좋음이 있겠죠. 아부를 듣고 싶은 게 아니었나요?”

“어, 아니다. 그리고 네 아부 별로거덩? 그니까 하지 마.”

“웃기고 있으시네…. 예에.”

 

저게 가장 큰 문제였다. ‘일단 검제에게 맞춰줄 수 있는’ 마인드. 고집이 세다 못해 철옹성 같은 녀석이 그에겐 맞춰준다. 왜냐? 그가 세상의 기준이니까. 누가 들었다면 제정신 아닌 것들이 같이 놀고 자빠졌다 하겠으나 이건 검제의 자만이 아니었다. 전제가 갖추어졌으니 그럼 간단히 생각해보자. 검제가 레이에게 말한다. 너를 사랑한다고, 연인이 되고 싶다고. 레이는 무어라 답할까?

 

‘저는 아닌데요?’

아니다.

 

‘그런가요, 그럼 사귀면 되지요.’

그렇게 1일이 되는 거다. 따란.

 

….

 

검제는,

 

검제는 그게 무척 후회되었다. 굳어버린 성향이 바뀌기엔 이미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일이. 제가 챙기지 못한 인연 중 확연히 저를 사랑하는 이가, 자신에게 먼저 손을 뻗을 수 없게 된 상황이. 그 때문에 시야를 잃고 그 때문에 기나긴 수명을 얻었건만, 레이는 검제에게 제 곁에 있어 달라고 말하지 못한다.

 

레이도 그를 사랑한다고 확신한다면, 연인이 된다는 약속은 둘 다 좋은 게 아닌가? 또, 레이가 그에게 같이 있자고 말하지 않더라도 그가 남아 있으면 되는 문제 아냐? 후회할 게 있어?

 

상황은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검제는 이제 레이를 사랑하게 되어서, 이령이가 저에게 무엇도 요구할 수 없게 된 부분이. 그 자체가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자신이 그를 원한다면 그도 자신을 원해야만 했다. 그게 도리에 맞는다.

 

 

-

 

 

“이령아 요거 좀 골라주라.”

“그럼… 이걸로 드세요.”

“좋아.”

“제가 사드릴 수 있는데요.”

“알지, 근데 괜찮다.”

 

검제는 일상의 사소한 부분들에서 레이의 의견을 묻기 시작했다. 대놓고 ‘네가 하고 싶은 게 뭐냐.’ 거창한 걸 물어보는 게 아니라, 대답을 유도하는 정도로. 검제의 옷을 고를 때 레이에게 추천을 받았다. 검제가 먹을 걸 레이의 선택으로 정했다. 그가 소소하게 부탁함으로써 레이도 자신에게 뭐든 부탁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이 정도는 네가 골라주어도 좋다. 레이는 그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게 버릇이 되고 곧 습관이 되었으면 했다.

 

“맛있는데? 너도 먹어 봐라.”

“맛있다면서요, 검제 많이 드세요.”

“에헤이. 야, 이령아. 원래 아끼는 사람이랑은 콩 한 쪽도 나눠 먹고 싶은 거 아니겠냐. 뭐해? 나 팔 아파.”

“엄살에도 정도가 있어요. …이건 잘 먹을게요.”

 

반으로 똑, 나눈 걸 받아든 레이는 얕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처음엔 의견을 물어봐도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세요.’ 정도로 대답하고 무언가 주려고 하면 ‘전 괜찮은데요.’ 이렇게 대답했었는데 이렇게나 발전했다. 캬아, 이거 뭐 키우는 기분이네.

 

레이는 그에게 왜 계속 머무르냐, 하고픈 일이 있는 건 아니었나 묻지 않았다. 어련히 가고 싶을 때 가겠거니 생각하는 듯싶었다. 지금 제가 누구 때문에 여기 있는 건데! 검제는 입을 주욱, 뺐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레이가 검제의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었을 시절 그를 기다렸던 시간이 지구의 계산법으로 가히 한 세기가 넘어간다. 만검세계에서 검을 쫓았던 시절까지 합하면 그게 전부 레이의 인생이겠지. 검제는 그 이상이 걸리더라도 그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레이는 검제의 곁에 있을 수 없었으니 영향을 끼칠 수 없었던 거고, 검제는 원한다면 레이의 곁에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거다. 훨씬 쉽다 못해 불합리하지. 그런데 원래 그게 인생 아니겠냐? 이령이가 나를 워어낙 좋아하니 이렇게 되네. 검제는 무표정으로 귀를 후볐다. 제 뒤에서 따라 걷고 있는 레이에게 시선을 두면, 안경알 너머의 회안과 눈이 마주쳤다. 저 느긋한 깜빡임조차 마음에 들었다. 나도 주접이 요란하군.

 

안경 아티팩트를 빼면 무엇하나 보이지 않으면서 정확히 저를 바라보는 점이 좋았다. 헌터니 기척이 예민한 건 당연하지만, 그런데도 검제의 기척을 알고 제가 들어올 곳을 미리 바라보고 있는 점이 좋았다. 검제의 존재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점이 좋았다. 레이에게 있어 검제는 실존하는 사람으로 불변不變할 것이기에. 거기서 오는 안정감이.

 

“무얼 그리 보시나요.”

“네가 눈 깜빡이는 게 재밌어서 좀 봤다.”

“재미없을 거 같은데요.”

“왜, 너도 전에 나 노려봤잖냐. 재미없었어?”

“그건… 재밌었죠.”

“그치? 그리고 이령아, 네 얼굴은 계속 봐도 웬만해선 안 질려.”

 

레이가 무언가 말하려 입술을 들썩였으나… 그게 말로 뱉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검제가 그거 진짜 물어보게? 정도의 표정으로 응수했기 때문이 아닐까. 검제의 눈썹이 휘었다 돌아오는 걸 보던 레이가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예전엔 그런 말 안 하셨잖아요.”

“사람이 바뀌기도 하는 거지.”

“저는 바뀐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저거 은근 정곡을 찌르네…? 검제는 그래, 그래. 고목처럼 안 변하고 있어 줘서 고맙다. 우리 이령이~ 수고했네, 수고했어. 가볍게 말하며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레이는 이 자식이 사람을 우습게 보는구나 싶어져 슬 눈가를 좁혔다. 표정이 불손한데? 검제는 말 얹는 걸 잊지 않고 어깨를 완전히 덮어 품 쪽으로 당겨 잡았다. 레이가 답답하다며 불만을 내뱉기 전에 그가 얼굴을 불쑥 내리곤 속삭였다. 얼씨구, 길거리에 사람도 없는데 분위기 잡기는.

 

“네게 변화가 생기면, 그때 할 말이 있다. 언제라도 상관없어.”

“그런가요.”

 

그러자 레이가 옅게 웃었다.

 

“너무 나중이라 마음이 식으면 어쩌시려 그래요.”

“엉?”

“어차피 고백일 텐데.”

“야! 아무리 알고 있어도 그걸 말로 하냐?”

 

뭐가 그리 우스운지. 레이는 아하하 소리 내 웃더니 입가를 손으로 가려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와중에 그게 기분 좋아서. 이런 감상 자체가 오랜만인 검제는 즐겁다곤 생각했다.

 

“눈에 빤히 보이다 못해 티를 내시는데 그럼 제가 어쩔까요. 낯부끄러운 짓에 면역도 없으시면서. 이령아 이거 하자, 저거 하자. 이건 네가 좋아할 거 같다. 네 생각이 나더라. 예쁘다 말은 못 해도 간접적으로 외모 칭찬이 부쩍 늘었지요. 지금처럼 이리 몸을 닿고 싶어 하는데….”

“와아아악! 그만, 쫌!!! 와… 너 진짜. 너 진짜…. 야… 내가 졌다.”

 

검제가 파드득 떨어져선 과장되게 귀를 탈탈 털었다. 저럴 거면서 왜 먼저 나대신담. 레이는 제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진작 놔 주지 그러셨어요.”

“너어는 진짜 나쁜 놈이다….”

“그런데 변화라면 무슨 변화요?”

 

어느새 멀쩡한 자세로 돌아온 검제가 다시 레이의 옆에 섰다. 마주한 눈동자는 언제나 같은 곧은 눈. 그는 장난이 담기지도, 흔들리지도 않는 어조로 바르게 말했다. 당연한 이치를 입에 담는 듯했다.

 

“이령이 네가, 우리를 동등하게 느끼는 거.”

“….”

“그것만으론 안 돼. 너의 무의식까지, 그게 당연한 전제가 돼서. 행동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거다.”

“그건….”

 

너무 오래 걸리지 않을까요?

 

레이의 머뭇거림에 검제가 웃었다.

 

금방이지.

 

앞으로도 함께할 자를 기다리는 건 너에게도 당연했고 나에게도 당연하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불변의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4.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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