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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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검 약 9,800자

주의: 살해 소재(잔인한 묘사는X) 전반적으로 칙칙합니다.

 

 


 

 

 

레이가 이변을 눈치챈 건 아마 3일째였던가?

안 그래도 엇비슷한 날들을 보내니 시간의 흐름을 부러 둔하게 흘려 알아채는 게 늦었다. 레이는 핸드폰을 들어 자기 전에 확인했던 달력을 눈에 담았다. 등천도시의 년도 법으로 2XX1년 7월 17일, 3번째로 맞이하는 똑같은 하루였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오늘은 레이에게도 검제에게도. 하다못해 등천도시에도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기념일이나 거대한 사건이 벌어지거나…. 레이는 검제가 차려준 아침을 먹으며 실은 오늘 탑 종말의 씨앗이 될 무언가가 시작되기라도 하는 걸까. 쓸데없는 생각도 했다.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이령아 이따 산책할래?”

“예, 좋아요.”

검제는 오후에 일이 있다길래 거절할 줄 알았다며 눈을 크게 떴다가 웃음 지었다. 그리곤 한껏 신난 뒷모습으로 씰룩거리며 부엌으로 향했다. 그에 픽 웃음을 흘리면 “너 웃었어?!” 안쪽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소한 일에 기뻐하는 게 별나다. 상대의 순수한 반응은 옅은 충족감을 주곤 했다.

 

나비효과. 레이는 식사 후 읽던 책을 덮어버렸다. 의미 없는 대화나 행동, 제안만으로도 미래란 건 크게 변화한다. 음, 크지 않아도 어쨌든 변화하긴 해. 레이의 하루하루는 변화 폭이 좁고 벌어지는 이벤트나 사건이 적기에 17일에서 나아가지 않아도 원래와 큰 차이가 없었다. 만일 상황이 강제되어 아예 똑같은 하루를 보내게 되었더라도 그는 반년 정도를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반복에 익숙하니까.

요지가 무엇인가 하면, 레이는 당장 검제나 이스타에게 알리거나 해결 방법을 찾는답시고 난리 피우지 않고 일단 지내보기로 했다. 반복되든 반복되지 않든 영원을 살아야 하는 건 똑같지 않나. 차이점이라 하면 배치된 인물이나 배경 또한 나이 먹지 않는 점이렷다. 레이는 주변이 뭐가 어떻든 상관없었다.

 

‘산책하자’는 검제가 짧은 데이트를 원할 때 묻는 제안이었다. 오후에 정말 일이 있으니 원래라면 나중으로 미루거나 했겠지만,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다시 오늘이 돌아온다면 일은 해도 하지 않아도 됐다.

앞서 걷던 검제는 네가 땡땡이라니 어울리지 않는다며 레이의 콧등을 살짝 눌렀다가 떼었다.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은 그가 레이의 일거리를 딱히 걱정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잡아 줘.”

인생에서 남의 의사를 물은 적이 10번은 될까 말까 한 자가 레이에게 청했다. 그 즉시 눈앞의 손을 맞잡으면 검제가 웃었다. 저건 질리지도 않지. 손부터 전해지는 열기나 맞추어 걷게 되는 보폭 등도.

레이는 그를 위해 한적한 시간에 한적한 공간을 걷는 이 시간이 좋았다. 아마 이 기억만으로 10년은 살아갈 수 있을 터다.

 

-

 

단 하나 거슬리는 점이 있다면 그의 기억이 보존되지 않는 점이었다. 나만 기억하는 추억이란 아쉬움과 약간의 상실감을 동반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

 

멈춰버린 레이의 수명처럼 24시간에 멈추어 가둬진 레이의 하루는 기다린다고 해결되는 종류가 아닌 듯했다. 372일을 그저 살아갔으나 여전히 2XX1년 7월 17일인 달력에 레이는 어떤 감정을 느꼈더라? 최소한 절망하진 않았던 거 같다.

 

중간중간 밤을 새어 보기도 했다. 뜬 눈으로 핸드폰의 화면을 노려보면, 2XX1년 7월 17일 23시 59분 59초에서 2XX1년 7월 17일 0분 0초가 되는 게 끝이었다. 세상이 뒤집히고 시계가 역으로 돌아가는 등의 드라마틱한 효과는 없었다. 간간이 해보는데 글쎄, 해결법은 아닌가.

 

유일한 예외인 검제를 제외하고, 레이 또한 다른 모든 이들처럼 탑에 예속된 영혼이니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가 탑을 올라 보았다. 이미 100층 전부가 하나의 시계로 맞춰진 등천도시의 탑이 아니라, 50층을 통해 이異세계로 넘어가 시간 축이 다른 장소에 가본다던가. 실은 이 방법으로 해결될 줄 알았었지. 탑주가 짜잔하고 나타나진 않을까? 대신 24시간을 넘겨 등천도시의 주거지에서 눈을 뜰 뿐이었다.

 

-

 

한참을 누워있다 침대에서 일어난 레이는 검제의 방으로 향했다. 새벽 4시의 창밖에서 외워버린 타이밍에 맞추어 여명이 둘을 드리웠다.

 

항상 새로움을 가져다주는 당신을 바라보면 창을 통해 들어온 옅은 빛이 그 몸에 스며들었다. 손을 뻗어 살결을 따라 팔 언저리를 쓸어올리는 사이 당신은 눈을 떴다. 타오르듯 기운 넘치는 붉은 동공은 오히려 저에겐 차분함을 가져다준다.

“어… 좋은 아침.”

“예, 안녕히 주무셨나요.”

레이는 검제의 미래를 제 시계가 막고 있는 건 아닐까 고민했던 날들을 다시금 상기했다. 그건 그동안 레이가 느리게라도 해결 방법을 찾는 작은 원동력 정도가 되었는데. 어쩌지. 만약 그 추측이 맞는다면 이런, 그게. 레이는 그에게 내일을 가져다주고 싶어졌다.

 

“그건 이상하네.”

 

검제는 턱을 짚고 고개를 우로 기울였다가 팍, 손을 떼었다.

“그니까 이령이 네가 지금 하루를 축으로 삼고 회귀하는 거잖아? 근데 그게 말이 안 돼.”

레이는 이해한다는 듯 끄덕였다.

“탑의 지하는 한 개고, 그건 고정된 거니까 같이 돌아갈 수가 없어. 나도 알고 싶진 않았던 정보지만… 암튼. 공자한테 빼앗겨서 무티아도 못 쓰는 게 시간 회귀야. 그게 어떻게 되는 거지?”

 

검제가 입을 다물었다. 레이는 원래 입을 다물고 있었으니 공기는 적막을 머금었고, 이내 레이는 다른 예상안을 꺼내려 했다. 하였는데. 마주한 검제의 얼굴이… 그는 이미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듯싶었다.

“너만 여기에 두고….”

그리고 한참을 침묵한다. 이윽고 아니지! 크게 외친 검제는 그의 머리를 탈탈 터는 걸로 모자라 레이의 어깨를 잡곤 탈탈 털어댔다. 그가 하고픈 대로 휘둘려 준 레이는 잠잠해진 뒤에야 어깨 위의 손을 잡아 내렸다.

“얘기는 여기까지 하지요.”

“너,”

“저는 내일 검제에게 물어봐도 되니까요.”

사라질 일이 되겠으나 검제는 인생에서 세 번째로 제 무능에 한탄했다. 아마 내일도 그다음의 내일도 또 그다음의 내일까지… 한탄할 게 분명하지.

 

정말로 레이는 여기에 혼자 남게 된 것일까. 어긋난 축을 가진 그는 이어지지 못하는 시간선에 버려진 걸 수도 있겠다. 다른 이는 전부 나중으로 향하고 쓸모를 다한 공간에 홀로. 그럼, 어쩌면 레이와 어울리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다시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느 대화를 기점으로 17일의 시작은 검제에게 하루를 반복한다고 보고하는 게 되었고. 혼자만의 기억이 아까우니 검제에게 유독 좋았던 날들을 말해주기도 했다. 그러면 검제는 지금 자신은 다르게 행동했을걸?! 말하곤 미소 지었다. 주어지는 어깨와 등을 다 감싸는 뜨거운 포옹도 나쁘지 않았다. 성역에 만발한 꽃의 수보다 많은 사람과 존재를 만났으면서 여전히 위로가 서툰 점이 그다웠고. 서툴면서도 해주려는 게 그다웠다. 의외가 아닌 점이 하나 더, 그는 언제나 레이의 말을 그대로 믿어주었다. 우스운 농담도 장난도 아닌 사실임을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레이가 그를 골리기 위해 뱉던 실없는 문장일 수도 있는걸. 검제는 놀림 받을 때 짓던 곤란한 낯조차 하지 않고 다만 그를 안아주었다.

“얼마나 됐어?”

“천팔백일이 조금 넘었어요.”

검제는 매일 거르지 않고 저 말을 레이에게 물었다. 신기하지. 올려다보는 레이의 시선을 마주 보던 그가 머뭇거리지 않고 대화를 이었다. 애써 가벼운 톤이다.

“언젠가의 내가 지루하게 굴진 않던?”

“그럼요.”

그건 당신의 평생을 전부 소모해도 불가할 것이다.

 

-

 

바람이 레이의 뺨을 두드리곤 지나간다. 심지어는 머리카락 또한 그 얼굴을 두드렸다. 정신없이 부나 끼는 머리칼을 정리하지도 않은 채 레이는 오른 허공에 손을 까닥였다. 어차피 외알 안경을 착용하지 않은 상태라 그의 시야는 깜깜했고, 시각을 대신이라도 하듯 거세게 부는 바람이 고막에 스며들어 전쟁통을 방불케 하는 소란함을 선물했다. 깎아지른 절벽의 세계는 드넓은 바다를 지닌 세계기도 하여서. 바람에라도 떠밀려 움직여야 할 필요성을 느낀 레이는 검제와 함께 이곳으로 넘어왔다. 시야가 아닌 청각에 담긴 풍경은 레이의 뼈 마디마디를 어느 정도 채워냈다. 시리고도 빠듯하군. 목덜미에 담긴 숨을 뱉으면 3년의 무게만큼은 가벼워졌다.

 

허공에 떠민 레이의 손을 붙잡아준 검제는 떨림 없이 그를 지탱해 주었다.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데엔 몇 분도 걸리지 않으니 참 편리도 하지. 요즘 세상이 많이 좋아졌어. 그런 대화를 나누다가 레이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둘은 그렇게 절벽 위를 천천히 걸었다. 이곳의 절벽은 등천도시나 만검세계의 절벽과 달리 침식되지 않는다고 한다. 처음부터 완성된 상태로 빚어진 온전한 절경. 파도가 꿈적하지도 않는 절벽을 밀어내려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가 쭉 이어진다, 그게 어딘가 불쾌했다. 저건 의미를 지니지 못한 행위가 아닌가.

 

사념에 잠기던 레이를 살핀 검제는 드높은 파도를 가벼이 밀어내며 말했다. 현실로 끌려 내려온 레이가 시선을 올려 그를 마주 보았다. 한쪽만 빛을 잃은 기이한 동공에 아직은 그가 담겨있었다.

“이령아, 다음엔 뭘 할까?”

“내일은 집에서 쉴 거 같아요.”

“뭐 먹고 싶은 건 없고?”

다 해줄게, 내가 요리를 좀~ 잘해야지. 레이는 부득이 지금 말해도 내일은 모르지 않느냐 말을 얹지 않았다. 검제가 다음을 입 밖으로 뱉는 게 갸륵해서… 흠… 아니, 애처롭다? 그래. 노력이 가상했다.

 

그래서 바다 산책은 레이에게 나쁘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다.

 

-

 

쌓지 못하고 없어질 하루를 얼마만큼 반복할 수 있을까?

 

레이는 좋게 말하면 인내심이 강했고 쉽게 말하면 버티는 데 능했다. 검제의 말을 빌리자면 그냥 딥따 존나게 견뎠다. 수명이 길어진 탓도 있지만, 하루하루에 의미를 두지 않고 열심히 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니 당연했다. 이로 사나 모로 사나 감상이 비슷하니.

 

사람을 안식으로 삼으면 안 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것도 같다. 안식이 아니라 구원이던가? 뭐든. 그런데 레이는 한 사람을 그의 세상으로 삼아버렸다.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하나로 흐르는 건 쉬워 보이지만, 또한 쉽게 끝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목적이 된 사람이 죽어버리면 어쩌나. 혹은 실망한다면? 끔찍하기도 하지.

검제를 축으로 삼아 다행인 건 ‘그가 죽지 않고’, ‘그는 변하지 않을 거란 신뢰를 주는 존재’인 사실에 있다. 그럼… 그가 죽으면 그도 죽을 수 있을까.

 

어렴풋이 침대 위로 쏟아지는 새벽의 빛무리와 항상 같은 자세로 누워 잠들어있는 남자. 어딘가 먼발치에 존재하는 풍경화 같았다. 레이가 멀어진 건지 검제가 멀어진 건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침대에 걸터앉으니 작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감은 눈은 이 정도 소란에 떠지지 않았다. 다른 이가 아닌 레이의 기척이니 깰 리 없지. 덕분에 몇 번이고 다른 방식으로 깨웠었는데.

 

검제는 그를 사랑한다고 했었다. 아니 편애한다, 였나. 애초에 그 감정은 진짜일까? 검제를 위했던 시간을 보상해 주려다 느낀 안타까움을 애틋함으로 착각한 걸지도 모르지. 그는 안타까운 이들에게 마음을 써주는 사람이니.

 

레이는 어느새 상대의 말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다. 그건 근간이 비틀어진 수준의 이상한 일이라 고쳐야 함이 마땅하나…. 쌓인 기억을 깔끔하게 도려낼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홀로 겪은 17일들 덕에 일방적으로 친밀해졌고, 감히 검제와 그의 깊이가 다름을 확신했다. 지나온 칠천일의 같은 하루가 그걸 뒷받침한다.

 

평온한 얼굴을 내려다보던 레이가 안경을 벗곤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닿은 입술은 서로 건조했다. 검제의 머리 옆, 체중을 받친 팔에 툭 큰 손이 스쳤다가 완전히 잡아 온다. 보이진 않으나 그의 표정이 빤히 상상되어 레이는 입술을 맞붙인 채로 옅게 웃었다. 잡은 손이 떨리고, 크게 홉 뜬 눈에 역력히 당황한 눈썹.

 

아침 키스는 연인이나 부부 사이라도 쉬이 추천하지 않는다. 이유야 역시 뻔하지. 검제는 뭐하냐 묻고 싶겠지만 열었다가 레이가 싫어할까 굳게 다물려 있어 그게 조금은 우스웠다. 어울리지 않게. “깨셨네요.” 레이는 말하며 품에 안기듯 상체까지 내려 붙였다. 이젠 거의 누운 모양새에 허공을 떠돌던 검제의 다른 쪽 손도 결국 레이의 허리로 안착했다. 잠자던 사람의 체온이 따뜻하다.

바로 떨어지지 않을 건가 싶었는지 검제는 흐음, 끙. 하는 소리만 흘렸다. 정신이 없어 보이긴 했다. 레이의 팔목을 잡던 손을 이마 사이로 넣어 밀어낸 뒤에야 그는 겨우 입술을 열었다. 힘주지 않은 손이 쭈욱 다시 밀릴 건 예상하지 못했을까.

 

“이령… 읍. 아니, 잠. …야!”

“예?”

“예?는 뭔 얼어 죽을 예?! 너 밤새 무… 읏.”

“그런 깜찍한 감탄사를….”

“허. 와, 참내.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냐? 아니, 쫌 그만.”

 

검제는 축축해진 입가 근처를 벅벅 문지를까 꽤 진지하게 고민했다. 근데 이령이 앞에선 좀. 착 붙은 몸체 너머에선 쿵쿵, 심장 박동이 들리는 거 같았다. 아마 제 심장 소리가 울려 돌아오는 거겠지만. 눈을 꾹 감았다 떠도 레이는 여전히 그의 위에 있었다. 흐린 미소는 평소와 같은 종류지만 검제가 보기엔 분명 무언가가 달랐다. 사람 간의 사소한 감정 변화. 세세하고 예민히 눈치채며 위로해 주는, 이런 건 자신 없는데.

쪽, 와중에 볼 근처를 스친 입술이 다시 그의 입가로 향해 왔다. 아…! 이령아, 모처럼 고찰 좀 하려 했건만. 그는 진작 입술이 닿은 시점에서 인내하는 중이었다. 그걸 레이가 알고 있으니 놀리듯 부추기겠지.

 

가볍게 들어 그가 누워있던 곳에 눕히면 빛이 들지 않은 백안이 검제를 올려다보았다. 자연스레 목에 둘러오는 팔에 속이 끓었으며 겹쳐진 입 안은 그렇게 뜨겁진 않았다.

 

이때까진 그래, 레이는 정말 나쁘지 않은 하루들을 보내고 있다 생각했다.

 

-

 

레이가 가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가 남지 않았을 때. 그는 돌아다니기가 싫어졌다.

 

-

 

레이는 설명하는 걸 그만두었다. 깎이지 않을 절벽에 부딪히는 건 무의미하다.

 

-

 

17일 이전의 기억이 흐려지고 같은 날의 사람은 그렇게까지 다채로울 수 없어서. 검제, 당신이 아….

걱정하는 그의 패턴이 무척 지루했다.

 

-

 

“이령아.”

레이는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조건 반사와도 같은 행동에 검제는 안심을 느끼곤 그 옆에 앉아 왔다.

“무슨 일 있냐? 그….”

그리고 뒷덜미를 슥슥 쓴다. 어색하고 낯부끄러운가. 레이는 하루를 다 사용해서 일대기 브리핑을 마친 뒤에 몇 번이고 받은 위로를 다시 받을 수야 있었다. 한시적이지만 갇힌 당사자보다 더 괴로운 표정을 지은 채 슬퍼하는 상대를 보면 그게 무엇보다 현실을 실감 나게 만들어 주니. 보름 정도 목소리를 내지 않던 레이는 없어질 검제를 위해 입을 열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응.”

“제가 오늘에 갇혔어요. 회귀는 아닌 듯하고.”

“응.”

“저만 이 시간선에 남은 거 같아요.”

“….”

“그러니 같은 장면을 영원히 되풀이 하는 잔상 같은 거지요. 필름이라 하던가요.”

레이는 손가락으로 검제를 가리켰다가 다시 그 자신을 가리켰다. 그는 막 태어났을 때처럼 의미 없는 존재가 되었다.

“얼마나?”

“….”

한참을 계산하던 레이가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십만일 단위가 되었을 때부터 안 세어서 잘 모르겠어요.” 그러자 검제의 표정이 볼품없이 구겨진다. 레이는 오랜만에 입술로 호선을 그릴 수 있었다.

 

“해결하지 못했구나.”

너도, 나도.

 

검제는 불가능이란 단어 대신 그렇게 말한 뒤 입을 다물었다.

“갖은 방법을 다 썼냐 물어보신 거라면, 예. 전 그것보단 즐겁게 보낸 날들을 선택해 기억하는 중이지만요.”

“….”

“떠오르는 방법 중에서 하나는 안 해보긴 하였네요.”

눈앞의 남자는 거부감이 가득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무얼 말할 줄 알고 미리 슬퍼하고 분노하는가. 레이는 죽어 본 적이 없었다. 흐르는 세계를 따라가지 못해 버려졌더라도. 고장 난 테이프 속에서 남들의 흔적을 그러모아 놀고 있는 꼴이어도. 검제가 원하지 않는 이상 죽을 순 없었다.

 

 

혹은 그가 죽거나.

 

 

레이가 30만 번쯤 돌아가는 동안에도 그처럼 기억이 끊기지 않은 이는 찾을 수 없었다. 이타적이고 선한 시선으로 보자면 오류가 난 건 저뿐이니 검제는 30만일을 멀쩡히 보내고 있을 거라 다행이었고, 쫓겨난 불순물의 시선으로 보자면 이렇게까지 좆같을 수가 없었다.

“당신이 숨 쉬는 모습이 눈에 담기는데 제가 어찌 자살하겠나요.”

“네가. 이령이 네가… 죽어보는 걸 실행하지 않아서.”

검제는 아프게 웃었다.

“다행이다.”

 

-

 

고마워.

레이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는 지금 제 상태가 아슬아슬함을 느끼고 있다.

 

-

 

내일은 레이에게 중요치 않은 단어가 되었다. 그게 누구의 내일이든. 그러니 그가 죽어야 이 짓도 끝이 난다.

 

-

 

레이의 두 손이 있는 힘껏 두꺼운 목을 졸랐다. 눈꺼풀이 들리고 자다 일어난 붉은 눈동자가 레이를 직시한다.

“큭, 허억….”

검제는, 그 자유로운 존재는 움직임을 허락받지 못한 듯 꼼짝하지 않았다. 그의 신체만이 부족한 숨을 채우려 작게 헐떡였다. 동시에 올라탄 레이의 몸도 들썩인다.

 

그들은 서로에게 많은 선택권을 준 관계였다. 레이가 원한다면 검제에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척이나 많았고, 검제가 원하기만 한다면 레이에게 무엇이든 해도 되었다. 그건 상대가 무얼 하든 괜찮을 거라는 무거운 신뢰라 불러도 좋겠으나 정확히는 허용이라 하는 게 옳았다.

 

레이는 숨을 내쉬지 못하는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벌어진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일은 없었다. 검제가 실제로 죽어가고 있다. 구태여 2번째 삶을 얻지 않고 하나의 생을 영원히 살 수도 있는 존재는 그의 손에 친히 숨을 멈춰주고 있었다. 바짝 힘이 들어간 목이 경련하듯 떨린다. 누군가 당기기라도 하는 듯 턱이 빳빳하다.

당신. 왜 누워 계세요?

간단히 레이를 밀거나 후려치면 이 뜬금없는 하극상은 끝날 거다. 그건 검제에게 무척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그 손에 질식하기를 직접 선택했다. 제가 그를 죽이지 않을 거라고 믿는 게 아니라, 지금의 행동 자체를 허용한 거야. 그제야 레이는 티가 나지 않던 하나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아. 그 긴 시간 동안 몰랐던 걸 벼락이라도 맞은 듯 알아채는 감각이란.

 

검제는 레이에게 죽어줄 수 있었다.

그럴 리 없어. 하지만 눈앞에 드리운 진실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희생할 순 없겠으나 직접 살해당하는 건 거부할 수 없을까. 저 정도 경지에 오른 이가 오러 한 방울 담기지 않은 손에 컥컥 거리는 꼴이 우스웠다. 레이는 두 손에 힘을 풀었다. 헉, 그가 숨을 몰아쉬며 기침하는 모습이 생경했다.

침대에 앉은 둘은 어떠한 말도 뱉지 않고 그렇게 몇십 분을 흘려보냈다. 검제 입장에선 자다 말고 목이 졸린 상황이군. 레이는 그가 화내는 모습을 떠올리며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그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냐?”

“그럼요.”

“….”

“당신의 목숨이 다한 뒤에야 제 목숨을 끊을 수 있어서요.”

검제는 그동안 죽고 싶었냐고 묻는 대신 다른 점을 짚어왔다.

“날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구나.”

“필수적인 전제죠.”

 

어제까지만 해도 차분하던 상대에게 목을 졸리고 30분도 되지 않아, 검제는 핵심을 짚어냈다.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현자 흉내를 낸다 질색했었지. 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만큼 사람은 고통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검제가 그동안 앎을 두려워했던 적은 없었다.

“두렵다.”

“검제?”

“두려워, 이령아.”

레이는 바다가 있던 세계나 그의 성역, 아니면 만검세계의 탑, 독점도시도 나쁘진 않겠지만. 어디로 향할지 고민하다가 이동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의 주거지였던 곳이 좋았다.

 

왜. 그 이유 하나 모름에도 검제는 레이의 결정에 따라주었다. 이유는 우선순위에서 밀려 나가는 쪽이지. 중요한 건 ‘이령’이고 검제는 그게 무척이나 괴로웠다.

 

남의 어깨를 빌리지 않는 자들은 온전히 자기 발로 걸을 수 있는 자식들이지. 남을 원망하지 않고 살고픈 대로 사는 자.

타인을 원망하지 않음에도 레이는 자신의 발로 걸을 수 없었다. 삶을 남에게 줘버렸으니까. 그는 생을 마치는 것조차 허락을 받아야 했다. 이건 레이가 뚜렷한 의지로 선택한 방식이다. 남들은 갖지 못한 무언가를 얻었으니 딱 그만큼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뿐이다.

 

“눈물 흘리시는 건 처음 보네요.”

“…그래? 엄청 웃다가 눈물 닦고 그랬잖아.”

“그렇겠죠.”

“….”

“슬피 울지 마세요, 당신 얼굴이랑 별로 안 어울려요.”

“이상하다. 우는 모습도 막 빛이 나고… 완벽히 어울릴 게 뻔한데.”

“웃어주세요.”

“응….”

“전부 어울리긴 해요. 그냥, 검제 웃는 게 좋아서요.”

 

검제의 수고했다는 말을 듣고 레이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침대에 누운 채로 자신의 신에게 빌었다. 다시 17일에 눈을 뜨지 않기를. 감은 눈 너머로 신이 흐느꼈고. 잘 자. 그리 말했다.

 

 

24.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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