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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9 / 9.19 - 케키 생일 기념 글.
케키 소꿉친구 if~ 이랬다면 이런 관계성이 이렇게 바뀌었을까 싶었습니다. 제가 쓴 글 연성 중엔 처음으로 마키케가 아닌… 케키.
얼음끼리 부딪쳐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만들어내던 아키요시는 떨어진 물방울에 짙은 색으로 변한 바닥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틀어 창문 밖으로 향했다. 얼음 소리가 묻힐 정도로 쨍하게 울리는 매미의 울음이 온 집안을. 또 아키요시의 귓가를 괴롭히고 있었다. 여름도 다 끝나가는데 더운 날씨와 저놈의 매미는 떠나지를 않았다. 흐음, 어쩌면 괜찮을지도 몰라.
아키요시는 여름을 싫어하지 않는 편이었다. 뻔하지만 춥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에게 있어 여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얼까. 습하진 않으나 살을 태우는 볕에 아키요시와 그의 친한 친구는 그늘 밑으로 들어갔고. 조심한다곤 하지만 꾸물거리다 닿는 축축한 손가락, 마룻바닥에 살이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 각막을 뜨겁게 만드는 열기와 돌담 위의 아지랑이. 그런 장면들은 아키요시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가족들은 한 번도 그리 말한 적 없었던 이상한 특징. 아키요시는 활발하며 사고 또한 치는 편임에도 존재감이 없었다. 그를 기억해주지 못하는 사람과 어떻게 친구가 되겠나? 방금까지 같이 놀던 친구의 무시에 아홉 번째로 싸운 날, 길고양이마저 그를 무시해 길거리에 주저앉아 운 적도 있었다. 그것조차 아무도 눈치채주지 못했지만.
그래서 항상 또렷이 눈을 마주쳐 오는 그의 친구가 좋았다. 벌건 모래에 넘어져 까진 벌건 타치카와의 무릎에 이름 모를 풀잎을 올리고, 짧은 손톱으로 겨우 깐 구겨진 반창고를 붙여주고. 아키요시가 ‘어때?’ 비죽 튀어나오는 웃음과 함께 물으면 타치카와는 살짝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 상태로 앉아있다 보면 챙 넓은 모자를 쓴 츠키미가 항상 오던 시간에 맞추어 아지트로 와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혼나곤 했다. 깨끗한 물로 상처를 씻을 땐 타치카와조차 표정을 잔뜩 찌푸렸었지. 지금보다 더 어린 시절의 생생한 추억이었다.
“아~ 덥다.”
다 먹은 빙수 그릇을 아무렇게나 민 타치카와가 뒤로 벌러덩, 눕더니 아키요시 쪽으로 목을 비틀었다. 아슬아슬하게 다리와 닿지 않는 거리에 아키요시는 엉덩이를 들어 옮겨 부슬부슬한 머리카락에 붙어 앉았다.
“날짜로 보면 이제 가을인데, 얼마 전에… 그거였잖아.”
“그렇게 말하면 모르지~ 아키요시.”
“그으… 입추.”
“입추가 8월에 있어?”
아키요시가 아마 맞을걸, 렌이 말해줬거든. 대답하자 타치카와는 그럼 맞네. 하곤 팔을 쭉 뻗었다. 부딪친 다리와 팔은 역시나 끈적했지만, 불평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빨리 가을이 되면 좋겠어. 춘추복을 입고 싶거든.”
그리고 우리 학교 여학생 춘추복 귀엽잖아~
킥킥, 웃는 타치카와의 머리카락을 빗던 아키요시가 손에 힘을 줘 살짝 잡아당겼다. 그제야 불만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키요시, 아프다고. 아프라고 그런 거야. 왜 갑자기 심술인데? 나도 몰라. 그리고 아키요시는 입을 다물었다.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헤집던 손은 조금씩 이동해 눈가와 볼 근처를 배회했다.
“안 어울리게 질투야?”
그 말에 평소의 아키요시라면 웃는 표정의 볼을 꼬집었을 테지만. 오늘의 아키요시는 멍하니 다른 기억을 떠올렸다.
여름 방학을 시작하기 직전, 흔하게 벌어지는 고백 이벤트들. 아키요시는 그런 행사와 연이 없었지만 타치카와는 퍽 연관이 깊었다. 남들보다 큰 키와 너스레를 떠는 성격에 웃음기 많은, 이성과 편하게 지내는 남학생. 타치카와가 여름 방학 개시 3일 전 옆 반 여학생에게, 무려! 복도 고백을 받는 장면을 봐버렸었다. 타치카와를 찾아 위층으로 올라온 거였는데…. ‘미안해.’ 그 대답에 고백한 학생은 울 듯한 표정을 지었던가.
“넌 여자애들이랑 두루두루 친한데, 여친은 안 사귀어?”
그 직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의 타치카와 옆에 앉아 아키요시는 그리 물었다.
“음… 아직은 사귀고 싶다, 고 생각한 여자애가 없는걸.”
그건 고백받은 사람이 하기엔 참 너무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누굴 좋아해 본 적이 없단 얘기야?”
“그렇게 되겠지?”
타치카와는 더 이상 묻지 않는 아키요시의 의자 뒤로 팔을 툭 걸쳐왔다. 츠키미의 추천으로 단정하게 잘린 단발은 그에게 어울렸지만, 타치카와의 주관으론 역시 긴 편이 더 예뻤다.
“아마, 누군가를 사귄다면 아키요시 너랑 사귀지 않을까.”
먼지 쌓인 에어컨 대신 창문을 열어둔 교실 안, 더운 바람을 등진 남학생은 그렇게 말하곤 가볍게 웃었다. 조금이라도 생각해본 흔적 따위를 찾아볼 수 없는 어투로. 아, 정말 생각 없는 자식이란.
타치카와가 말한 문장은 소꿉친구끼리의 ‘계속 연애도 결혼도 못 하면 늙어서 우리끼리 결혼하자.’의 의미였을 수도 있고. 어쩌면 그가 다른 친구들과의 대화 도중 하던 ‘예쁜 게 좋잖아~ 아키요시는 내가 본 사람 중에 예쁜 거론 손에 꼽지.’ 그런 종류의 연장선이 되는 말이었을 지도 몰랐다. 또래끼리 하는 아이돌이나 선후배 등의 외모 품평 대화 같은 거.
대답 없는 아키요시의 반응에 흥미를 잃었는지 타치카와는 금세 빈 책상 위로 엎드렸다. “지금은, 그런 거보다 다른 게 더 즐거워.” 그렇군. 요지는 현재 타치카와가 관심을 가진 주제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연애 따위. 아키요시도 별다를 건 없었지만, 그랬었지만. 방금까지만 해도 더웠던 체감 기온이 훅 낮아져 아키요시는 발끝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울렁거리는 시야와 머리는 더위를 먹은 게 아니라… 아마 불안 때문일 것이다.
그 뒤로 아키요시는 타치카와를 의식했다. 지금까지. 간간이, 계속.
질투냐는 타치카와의 투덜거림으로부터 8분가량이 지났으나 아키요시는 바로 대답하듯이 평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
타치카와는 의외였다는 의미로 눈썹을 까딱였고, 아키요시는 뜨거운 체온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학 과제 안 했지? 난 안 할 거니까. 너도 그럴 거라 믿고 있을게, 케이.” 응, 하고 지은 미소는 느리지만 확실히 아키요시의 모든 구석을 훑고 지나가는 그것이었다. 여름과 가을 사이의 구름처럼.
아키요시는 말 보단 행동이 먼저인 사람이고 깊게 사색에 빠지는 이도 아니었다. 참을성이 없다고도 할 수 있겠지. 호감이고 애정임이 확실한데… 성미 급한 아키요시가 고백을 미룰 이유를 찾지 못해, 그렇게 평범하고 뜨뜻미지근한 고백은 튀어나왔다.
개학 직전 8월 29일.
그날은 날씨도 타치카와의 생일을 축하하는 듯이 맑고 개운했다. 낮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아침과 저녁엔 쌀쌀했지. 오전부터 부모님에게 강제로 깨워진 아키요시가 제 몸을 박박 닦고 향한 곳은 타치카와 댁, 도착하면 타치카와 대신 츠키미가 문을 열어주었다. 복작하면서도 단출한 파티는 그리 오래 이어지는 종류가 아니었으나 잔뜩 축하를 받은 타치카와는 내내 웃는 표정이었을 것이다. 축하 후에 바로 떠난 친구와 해가 지기 전에 간 친구, 저녁을 먹기 전 선물을 주고 나간 친구.
‘해피버스데이-케이’라고 적힌 생일 모자를 삐뚤게 쓴 타치카와와 함께 저녁을 먹고 츠키미는 다음에 보자, 살포시 웃는 표정으로 돌아갔다.
“아키요시 집 멀잖아. 안 가봐도 돼? 데려다줄까?”
멀찍해진 츠키미의 뒷모습을 보던 아키요시는 집 담장에 기댄 채로 주르륵 주저앉았다. 그걸 따라 타치카와도 허리를 숙여왔다.
“괜찮아. 엄마가 데리러 온다 했거든.”
“그래? 엇, 아키요시 잠시만.”
크크, 인위적인 웃음을 낸 타치카와가 손을 뻗어 아키요시의 뺨에 손가락을 올렸다가 떨어졌다. 아까 먹다가 묻힌 건가? 왜 몰랐지, 바보 같아. 부끄럽게. 손바닥으로 얼굴을 꾹 밀면 적당히 따뜻한 온도가 느껴졌다.
“케이, 잘 들어 봐.”
“응.”
새 소리인지 벌레 소리인지 모를 여름 저녁의 울음에 조금씩 묻힌 말들은 아키요시의 기억이 정확하지 않아 전부 기억나진 않는다. 풀이 겹치고 흔들리던 소리는 꽤 정확하게 기억나는데 말이지.
아키요시가 말을 전부 마치자 타치카와는 가까운 땅바닥을 봤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곤 가볍지 않은 투로 말했다.
“나도 네가 좋아.” 그 순간 분명 심장은 떨어졌다 붙었었다. “아키요시 넌… 연애하고 싶댔지. 확실히 그런 쪽으로 좋아한단 말은, 섹스하고 싶다는 거야?” 아키요시는 고개를 끄덕였던가.
“난 친구 사이로 계속 있고 싶다는 쪽으로 좋아.”
봐, 아키요시. 내가 그런 감정이 없다면 결국 길게 이어지지 않을 걸 알아. 넌 사귀다가 헤어지면 날 안 볼 거잖아.
“그렇지.”
타치카와는 아키요시를 예상보다, 어쩌면 아키요시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내가 널 찼으니까 얼굴 안 보겠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 아키요시, 내가 싫어졌어?”
“아니.”
“앞으로 어색하게 굴 거야?”
“아니.”
그럼 계속 이대로 지내자. 그래. 타치카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키요시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잠시 앉아있었다. 여름이 끝나는 시기, 꽤 서늘한 바람이 부는 저녁. 그가 얇은 옷에 재채기를 뱉으면 타치카와가 그럴 줄 알았다며 겉옷을 벗어 건네주었다. 습관과도 같은 익숙한 교환이었다.
몇 분 뒤 아키요시의 엄마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름을 불러 와 아키요시는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타치카와는 담장 옆에서 손을 흔들었고 아키요시도 마주 흔들어 주었다.
타치카와의 말을 차분히 곱씹어보니, 놀랍게도 마찬가지로. 그러했다. 여기서 더 멀어지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관계는 딱히 바뀌지 않아도 좋았다. 날씨와 함께 들떴던 마음이 기온처럼 시원해져서 욕심 또한 가라앉았다.
사이를 망치지 않았다는 만족감도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
아. 타치카와는 그 순간이 찾아왔을 때 아키요시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한 게 여전한 후회로 남아있다.
하늘이 무너지며 찾아온 이계에서의 침공은 마을 곳곳에 큰 상흔을 남기고 천천히, 빠르게 지나갔다. 타치카와는 연약했던 친구의 마지막 우는 모습을 보았고 아키요시는 조금 변해버렸다. 어쩌면 조금 많이.
이제 연약하지 않은 아키요시는 ‘쓸데없이 울지 않겠다.’ 말했다.
그의 동생과 함께 툭하면 엎어져 울었으면서. 저번 생일엔 제가 준 선물에 폭소하다 흐른 눈물을 닦아냈었는데. 중학교도 다 마치지 못한 주제에 호적에서 혼자가 된 아키요시는 고등학교를 재학하지 않겠다고도 했었다.
정말 고등학생이 아닌 사람처럼 결석과 조퇴를 하긴 하지만. 아키요시의 옷장에 고등학교 교복이 걸려있다는 걸 타치카와는 위안으로 삼았다.
“…고마워.”
불타버린 아키요시의 몫 대신, 타치카와는 자신의 집에 몇 장인가 처박혀있던 사진을 모아 아키요시에게 주었다. 이걸 찾기 위해 장장 4시간 동안 지저분한 방을 치우고 온 집안을 뒤적였다는 사족은 붙이지 않았다. 아키요시의 표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제 잃어버리지 않을 거라는 그의 지갑 안엔 타치카와가 준 하나의 사진이 끼워졌고, 그나 그의 동생이 츠키미 댁에 두고 다닌 물건 등은 원래 주인의 자취방으로 옮겨졌다. 작아져 신을 수 없는 노란 신발 한 짝은 진열품처럼 텅 빈 책장에 전시되었다.
그들이 친구가 아니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추억의 복구에 아키요시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도 조금씩 복구되었다. 타치카와는 그게 기껍다고 생각했다.
세 명 중 누구도 서로 약속했다거나 제의를 한 건 아니었지만, 그들은 자연스레 보더에 입대했다. 아키요시와 타치카와는 전투 대원으로 츠키미는 오퍼레이터로. ‘츠키미 넌 정말 똑똑하니까 분명 잘하겠지. 어울려.’ 얼핏 들으면 부러움이 섞인 아키요시의 농담에 츠키미는 진심으로 기쁘게 웃어주었다. 그의 흉이 느리지만 괜찮아지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타치카와는 학교에 나오지 않는 아키요시를 구박하지 않았다. 대신 나오는 날엔 다른 학년의 층에 굳이 얼굴을 들이밀곤 꼭 농땡이 장소를 하나씩 소개해 주었다. 어때, 여긴 교장도 모르는 곳일걸? 뒤늦게 쫓아온 츠츠미가 곤란하게 머리를 긁적이면 아키요시는 불량 학생 때문에 고생이라 말하곤, 수업을 땡땡이쳤다. 바쁘디바쁜 아라시야마가 아키요시에게 그럴 수도 있다며 웃었던 건 역시 의외였지.
보더에 입대하고 오히려 주변 친구가 늘어난 건 나은 변화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전처럼 자주 웃진 않았으나 아키요시는 1년 반이라는 시간을 천천히 거쳐 비일상에 적응했다.
전부 내 도움 덕분이지.
타치카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빨리 보더에 가고 싶어. 훈련 시간이 너무 적다고.”
질리도록 들은 타치카와의 투덜거림에 아키요시는 관심 없다는 듯 연필을 까딱였다.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장을 달리는 한 학년 위의 학생들을 바라보다, 뻔뻔하게 달리지 않고 아키요시의 옆자리에 앉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키요시 도화지가 하얗네. 풍경화 그려야 하는 거 아니야?”
“생각이 없어서 아무것도 안 그리고 낼 예정이야. 너야말로 운동 안 하냐?”
“몸 움직이는 거 좋긴 한데, 아키요시랑 수업 중 데이트할 기회를 놓칠 순 없지.”
성실하지 않은 학생을 담당한 교사가 안쓰럽군. 아키요시는 그리 생각하다가 타치카와의 투정에 대답했다.
“본부장이 훈련 많이 안 해줘?”
“그 사람은 바쁘거든. 훈련해 줘도 그렇게 길진 않아.”
“조퇴하고 빨리 가면 되잖아.”
“임무도 없는데 멋대로 조퇴하면 안 어울려주더라고.”
“고지식하네.”
그런가? 그래도 실력은 확실히 팍팍 늘어나니까. 저번에는 45라운드를 안 끊기고 하자는데 진심 죽는 줄 알았어. 센쿠를 어떻게 써야… 그리 나가는 거지? 연습해 봐야 하는데.
주절주절 궁금하지 않은 얘기들을 말하는 타치카와의 표정은 어딘가 들떠 보였다. 다 망하는 줄 알았던 세상이 멀쩡히 고쳐진 뒤, 손에 잡은 기다란 검이 꼭 적성에 맞는다고. 타치카와는 즐거움을 찾아내었다. 아키요시는 그게 부러웠었지. 재밌다기보단 의무적으로 욕구를 처리하는 것처럼 장난감 무기를 휘두르니 실력 같은 게 늘 리가 없었다. 나도 재미를 느끼면 실력이 늘까? 지치고 질려도 홀로 하는 훈련 시간을 2배로 늘려볼까.
“렌이랑 전술 배우는 건 잘하고 있어?”
옆에서 들려온 질문에 아키요시는 음…. 고민하는 소리를 내었다.
“내가 멍청해서 진도 따라가기 힘들어. 그래도 몸으로 익히면 더 나아질 거야.”
“그건 나도 그랬어.”
그리곤 같이 웃었다. 타치카와는 너도 스승을 만드는 건 어때? 하고 말했지만 아키요시는 고개를 저었다. 받아줄 사람이 있어야 부탁도 하지 않겠냐고.
타치카와는 초창기부터 누군가에게 가르침 받을 실력은 아니었다. 극상위권인 그에게 과연 누가? 대원 중엔 지금도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본부장이 유망한 대원에게 선뜻 훈련을 시작해준 건 의외와 동시에 당연하게 느껴졌다. 아키요시에겐 당장 타치카와와도 실력 차이가 극명하니 다른 세계 이야기 같군.
“들어보면 훈련도 대련도 힘들어 보이는데.”
“2년이 더 지나도 못 따라잡을 것 같아서 열 받긴 하지.”
“케이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무섭다.”
“뭐가? 훈련이?”
“훈련도, 본부장도.”
타치카와는 과장되게 눈썹을 찌푸린 채로 대답에 뜸을 들였다. 그러든 말든 아키요시는 다시 도화지로 시선을 내렸다. 아키요시가 느끼기엔 타치카와랑 닮은 얇은 나뭇잎이 살랑거리며 종이 위로 떨어져 있었고, 털어내거나 집는 대신 그 주위로 연필을 둘러 모양을 본떴다. 결국엔 그렸으니 제출할 제목을 고민하는데 그 찰나에 아주 약한 바람이 불자 나뭇잎은 그걸 타고 반짝 사라져버렸다. 쉽게 잡히지도 않고 가볍고, 멋대로 돌아다닌다. 주변의 사소한 환경에 잘도 떠다니는군. 그건 아키요시 같거나 타치카와 같았다. 이 감상 그대로 제목을 지으면 한 소리 듣겠지만.
아키요시가 뒷장 제목란에 ‘나뭇잎’을 적을 때에서야 타치카와는 입을 열었다.
“엄하긴 해. 아직 안 친해서 잘 모르니까 그런 건가. 칼이 꽤 무겁던데, 그 탓일 수도 있고.”
“안 궁금해…. 그리고 친하지 않아?”
케이, 라고 부르던 목소리와 얼굴을 떠올려낸 아키요시는 울리는 수업 종소리에 치마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휭, 하고 세차게 분 바람에 풀잎들과 나뭇잎 같은 타치카와의 머리카락이 섞여 흔들거렸다. 학교 운동장의 잔디와 모래 냄새는 좋아하진 않아도 늘 매캐한 익숙함을 가져다주었다. 떠들썩해진 학생들의 소리를 뒤로 하고 타치카와는 앉은 모양새 그대로 그에게 손을 뻗었다. 손을 맞잡으면 눅눅했고, 미지근하며 따뜻했다.
“다음에 소개해 줄게.”
아키요시가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다.
지저분한 타치카와 부대실은 어느새 보더에선 정착한 풍경이 되어 이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타치카와는 먼지인지 무엇인지 모를 뭔가를 소파에서 대충 털어내고 아키요시를 그곳에 앉혔다. 아키요시는 전혀 개의치 않고 다리를 꼬고 앉아 마실 거리를 요구했다. 얘 자취방 저번보다 더 더러워져 있을까….
시끌벅적 요네야와 함께 들어오려던 이즈미가 문을 열자마자 다시 나간 우스운 일 빼곤 특별한 일 없이 무난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약속 시간에 맞춰 방문한 아즈마에게서 전술 특강을 듣기 전까진 살짝 졸았을 정도로. 설명이 끝난 뒤 25% 정도 이해했다고 말하면 저번보다 12% 늘어났네! 아즈마가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츠키미 대신 자리를 채워준 그는 바쁜 대학생답게 얼마 안 가 사라졌다.
“아키요시, 스와 씨 기억해?”
“누구?”
“그 있잖아. 양키 같은…. 얼마 전에 마작 세트를 부대실에 들였던데.”
“그렇게 말해도, 흠….”
정규 대원이 많지 않아 빠르게 도는 방위 임무 시프트를 슬쩍 확인한 아키요시가 남은 휴식 시간을 가늠하던 중, 부대실 문이 자연스레 열렸다. 해당 대원 아니면 못 여는 거 아니었나?
“케이, 여기 있다고 들었는데….”
아키요시가 본부장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처음 든 감상은 봐왔던 이미지보다 젊은 느낌이네, 였다. 말을 멈춘 시노다의 시선은 정확하게 아키요시를 바라보고 있어서 그것도 신기하긴 했다. 잘 모르는 사이인데 용케 아키요시를 의식한다.
“아 미안하군. 수고가 많다 노리토 대원.”
“시노다 씨? 무슨 일로…. 아, 훈련 시간 바뀐 게 오늘이었나?!”
“케이… 정말 까먹었을 줄이야. 벌써 30분 지났으니 할 거라면 서두르도록 해.”
“당연히 해야지! 지금 바로 가자. 아키요시, 계속 있고 싶으면 여기 있어. 금방 올게.”
“그럼 노리토 군에게 미안하지.”
그리고 케이, 부대실이 너무 지저분하잖아. 내가 주기적으로 치우라고 했겠지? 자꾸 이러면 청소시킬 거라고도 했고.
껴들지 않으려 아무 말도 뱉지 않던 아키요시는, 타치카와가 꽤 전에 말했던 ‘시노다 씨는 어쩌면 만만할지도 몰라.’ 문장의 평가를 수정했다. 헛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약간 만만해졌다. 미디어 실장도 이쪽 부대실은 포기하지 않았던가? 본부장이 잔소리하는 것도 좀 웃기는군.
움직이지도 않고 얌전히 앉아있으니 인식에서 멀어질 만도 한데, 시노다는 잔잔히 웃는 표정으로 아키요시를 보며 말을 걸었다. 어차피 선은 넘지도 않을 주제에. 다정한 보더의 인간들은 이래서 싫었다.
“노리토 군이 괜찮다면 같이 가는 건 어때. 대련을 보고 평가하는 행위도 도움이 될 거다.”
아키요시는 “네, 좋아요.” 대답하고 그 뒤를 따랐다. 타치카와의 소개해 준단 약속은 잊혔지만 결국 원래 알던 사이처럼 대화를 나눴으니 결과만 보자면 비슷했다. 눈앞에 보이는 딱딱할 정도로 바르게 걷는 자세가 왜인지 마음에 들었다.
아키요시의 고등학교 졸업이 머지않았던 시즌에 그는 파워 업 할 기회를 얻었다. 우연처럼, 어쩌면 흐름처럼. 아키요시는 기꺼이 기회를 움켜잡았고 타치카와는 자격조차 없었던 블랙 트리거에게 선택받아 S급이 되었다. 다른 이 없이 아키요시 혼자만이 얻은 기회라 타치카와가 딱히 질투하진 않았었지만.
또 너무 당연하게 아키요시는 본부장의 제자가 되었는데, 정말로. 그 누구도 그걸 특이 케이스라고 느끼지 않았다. 아무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지 않았고 부정적인 의견도 긍정적인 의견도 나오지 않았는데, 아키요시의 사이드 이펙트 탓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보더의 전부가 그 흐름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아키요시도 시노다도 큰 감상은 없었다.
타치카와만이 이 분위기가 기묘하다, 속으로 삼킨 뒤 잊어버렸다.
“아키요시, 과제 또 안 할 거야? 이번에도 F 받으면 시노다 본부장이 뭐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의 목소리에 아키요시는 테이블을 노려보다 팔짱 끼는 걸 선택했다.
“이미 늦었잖아. 뒷일은 나중에 생각할게.”
“정말….”
포기한 목소리는 킷타카의 몫이었다. 옆에 앉아 단정한 미소를 지은 건 츠키미, 걱정하는 시선은 카키자키, 누군가에게 이를 생각을 하는 건 이코마. 아키요시까지 동갑의 다섯은 느긋하게 빈 시간을 공유하는 중이었고, 대화의 흐름은 줏대 없이 이리저리 다양한 구석을 건드리며 지나가고 있었다.
“요즘 고민이 있는데, 고백 아닌 고백을 받아서…. 아. 이건 보더 밖 얘기야.”
카키자키는 아주 곤란한 표정으로 모르는 일반인에게 편지와 선물을 받고 있다 털어놨다. 아키요시는 그의 연애 사정이 전혀 궁금하지 않았지만, 편지 내용은 궁금해 털어놓으라 종용했다. 이코마가 귀여운 여자애야? 물었으나 그건 모두에게 무시당했다.
“선을 지키는 눈치 빠른 아이네. 싫지 않다면 받아주는 건 어때?”
타인의 얘기처럼 거리감 멀게 해결책을 제시한 츠키미의 말에 카키자키는 어색하게 웃었다.
“잘 챙겨주지도 못할 텐데…. 그 애에게 실례 아닐까? 연애 생각이 없기도 하고….”
“사귀다 보면 좋아하게 될 수도 있잖아.”
아키요시의 말에 네 명은 동시에 그를 쳐다보았다. 꽤… 의외라는 표정들이군.
“뭘 그렇게 봐?”
“연애에 요만큼도 관심 없어 보이는 네가 그리 말하는 게 신기해서….”
“안 맞은 지 좀 됐지, 자키?”
털털하게 웃는 표정의 카키자키를 뒤로 하고 킷타카는 여전히 동그란 눈썹으로 말을 얹었다.
“이런 주제로 얘기하는 거에 어울릴 줄 몰랐어, 아키요시.”
“왜?”
“음….”
그야, 넌 전투를 제외하면 그 무엇에도 관심 없다는 듯이 굴지 않았니. 츠키미는 나쁜 선택지 대신 산뜻하게 말을 돌려주었다.
“좋아하는 애가 있다며 호들갑 떤 적은 없으니까 말이야. 나조차도 들은 적 없고.”
츠키미와 아키요시가 얼굴을 봐 온 기간은 정말 길어서 이해가 가는 이유였다. 아키요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누군가에게 상담한 적은 없었으니까.”
“연애 상담할 게 있어?! 아키요시 너 좋아하는 사람 있었어?”
“있었냐니? 지금도 있는데.”
이코마를 제외하고 모두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키요시는 말을 끊지 않고 그대로 이어서 대답했다.
“시노다 씨를 좋아하거든, 그런데 딱히 상담해야겠단 선택지는 못 떠올렸어.”
그 말엔 다들 놀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아키요시에겐 그게 더 의외였다.
“이런 거엔 안 놀라는군. 알고 있었어?”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본부장은 인기가 많으니까 말이야.”
“우리 또래도 그렇고 좋아한다는 직원이 꽤 있어서 엄청 놀랍지는 않은데….”
아키요시 네가 좋아한다니까 신기하긴 하다. 상담이라고 해도… 안 하는 거랑 별 차이 없지 않았을까? 고백해도 안 받아줄 거란 결론이 나온다는 점에서. 역시 그렇겠지. 그냥 깔끔하게 고백하고 차이는 건 어때? 널 차고 싶으니까 입 다물어.
“조언해줄 건 없고 다들?”
“뭐… 힘내라, 노리토.”
“알겠다. 흠, 케이가 시노다 씨랑 친하니까 케이한테도 물어봐야겠다.”
아키요시의 혼잣말이 끝나자 툭, 하고 생각할 새도 없이 떨떠름한 반응들이 튀어나왔다.
“그건… 안 물어보는 게 낫지 않을까?” 카키자키의 반응이었다.
“어어, 타치카와 씨는 이런 쪽 조언 안 해줄 것 같기도 하고.” 킷타카의 반응.
“그거 좀 그렇지 않나?” 이코마의 솔직한, 반응도.
츠키미는 가만히 웃었다. 렌, 너는 알고 있을 거야. 친구들의 저 반응은 예상 내였다. 아키요시와 타치카와가 최소한 묘한 사이라 생각했을까? 어렸을 적부터 친구인 만큼 거리감이 가까우니. 타치카와의 행동으로 인해 그가 저를 좋아한다 생각하는 이도 어딘가엔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웃기지 않게도.
얼마 전, 그와 제가 몸을 섞었을 거라는 뒷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아키요시가 있었으니 앞말인가? 아무튼. 그건 아키요시에게 수치스럽다거나 화가 나는 식으로 다가오지는 못했다. 그저 다가가 얼굴을 한 대 치고 끝났던 사건 정도였다.
그리고 이해가 되기도 해. 남들이 보기엔 그리 느껴질 수도 있겠지. 케이와 혀라도 섞으려 하는 순간 그 자식은 저를 주저 없이 밀쳐낼 텐데, 그걸 알면 녀석들은 비웃음을 터트릴까.
아키요시는 타치카와를 앞에 두고 타치카와를 생각했다. 몇 년이나 지났으나 여전히 뚜렷한 그해에 일어났던 일들과 마지막으로 즐거웠던 절친의 생일 파티 같은 종류. 소란스레 웃던 소리는 그때엔 아직 거슬리다 느낀 적 없었고, 붕붕 공중으로 뜨는 머리카락을 내버려 둔 타치카와가 해변을 맨발로 뛰어가던 장면이나. 연처럼 살랑거리는 옅은 색의 치맛자락을 정리하던 츠키미가 손을 내밀어 맞잡았던 기억. 직후에 타치카와가 뛰어들어 웅덩이 위로 넘어질 뻔했었다.
“무슨 생각해?”
“네 생각.”
“호오.”
“그리고 렌.”
“아하.”
“또, 시노다 씨도.”
“으음?”
아키요시는 빈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려놓으며 멋대로 연애 상담을 시작했다. 타치카와는 주변에 사람이 있든 말든 꽃받침을 해왔다.
“와아, 시노다 씨를 좋아해?”
타치카와는 덤덤하게 말을 마친 아키요시를 보며 의외라고 생각했다가 의외가 아닌가? 싶어져 턱을 괸 상태로 제 볼을 두드렸다. 친구 된 의무로 아마 스승보단 또래들 상대로 더 적절했을 조언 몇 개를 해주고, 가망 없고 쓴 외사랑을 위해 다디단 음료수를 하나 사주었다. 아키요시는 그걸 먹다 뱉었다.
당장 매일의 일정에 아키요시와 시노다는 훈련을 할 터였다. 타치카와 또한 할 수도, 안 할 수도. 그의 상담을 들었지만 무언가… 다른 감상이나 감정이 들지 않았다. 큰 관심거리가 되지 못한 채로 하루가 지났고 똑같은 날들이 지나갔다. 가끔 아키요시가 시노다에 대해 언급할 땐, 그와 사랑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아 웃긴다곤 생각했다.
아키요시는 가장 근처의 타치카와마저 잊을 정도로 티를 내지 않아서 그렇게 잊어갈 때쯤. 아마 이틀만 더 지났다면 완전히 까먹었을 적절한 시기에 이벤트가 벌어졌다.
“좋아합니다!”
본부의 직원일까? 보더에서 고백을 했으니 당연했다. 떨리는 음성을 숨기지 못한 남자…. 키는 타치카와보다 더 작아 보였다. 잘생겼단 소리를 듣진 못했겠으나 멀끔한 편의 얼굴은 진지한 표정으로, 퍽 믿음직한 인상을 주었다. 나이는 아키요시나 타치카와보다 많겠다.
연상, 흑발의 차분한 남성.
전혀 닮지 않았지만 일련의 포인트로 타치카와는 제 스승을 떠올려낼 수 있었다.
‘저를 구해준 걸 기억하시냐.’, ‘그때 한눈에 반했다.’, ‘당신을 만나 꼭 감사 인사와 고백을 전하고 싶어 보더에 입대했다.’ 아키요시는—타치카와로서는 전혀 궁금하지 않은—일대기를 가만히 들어주고 있었다.
잠깐. 아키요시? 그걸 들어 줘?
웬만큼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기억도 나지 않을 아키요시에게 반해서, 기억하고, 좋아하고. 그래서 입대해 잊지 않은 채로 이리 고백을 했고? 주먹을 꽉 쥔 저 사람이 진심이라는 걸 타치카와는, 아키요시도 알 것이다.
타치카와는 고개를 돌려 시선 둘 곳을 찾았다. 아무것도 시야에 들어오질 않았다. 완전히 코너를 돌지 못한 채로 가만히 서 있는 꼴이 우스웠다. 바닥을 보자 눈 끝에 걸린 트리온체의 검정 구두가, 그 흑색이 위 속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는 놀랍게도. 그 자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거대한 어떤 충동을 느꼈다.
뇌가 세게 얼었다 풀린 듯한. 이 죄어오는 따가움을 적절히 표현할 단어가 뭐지?
이게 과연 어떤 감정에서 돌출된 충동인지 타치카와는 몰랐다. 대신 그가 10,000포인트를 잃을 뻔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고백은 거절할게.”
A급 1위에겐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키요시는 네가 누군진 기억나지만 널 잘 모르니 사귀어 줄 수 없다, 말했다.
아키요시가 코너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그 직원은 자리에 서 있었고, 타치카와는 웃는 표정으로 복도 밖까지 걸어 나와 아키요시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유치하군.
“아키요시, 기억이 난다고?”
네가 고백받는 장면을 봤다는 이실직고를 포함한 질문에 아키요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물은 건데 정말이었다니.
“얼굴만 기억나. 뱀스터에게 짓밟힐 뻔한 걸 내가 대신 깔려줬으니까. 주저앉아 질질 짜길래 달래서 집으로 보냈어.”
타치카와는 달래지 않았을 거란 확신과 함께 보더에 보고는 안 했고? 물었다.
그랬으니까 쟤 기억에 남아있겠지. 너 그거 위반인 건 알지? 알아. 그리고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타치카와도 그 이상 흐릿한 인상의 이름 모를 남자와 아키요시의 규칙 위반을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그가 여전히 스승을 좋아하고 있을지가 궁금했다.
아키요시는 예전에 나에게 고백했었는데. 취향이 엄청 줏대 없다고도 생각했고, 스승에게 고백했다가 차이면 보더에서 나가는 건 아닌가? 가능성 있는 예상도 했고. 시노다 씨가 부르던 “아키.”라는 친근한 호칭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아키.”
“응?”
타치카와는 턱을 들어야만 저와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제 친구를 내려다보았다. 불러본 적 없었던 애칭과 익숙한 얼굴, 약간 색다른 표정.
이건 몹시 마음에 들었다. 짜증 날 정도로.
“에취!”
푸흡, 아키요시의 웃음에 타치카와는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아키? 비웃었어? 그래 비웃었다. 재채기 소리 한번 참 남자다워서. 너무하네~ 아키요시는 춥다며 달라붙은 타치카와를 떼어내지 않은 채로 손에 든 책을 넘겼다.
“이제 낮에도 안 더우니까 반팔 입지 말라고 했지?”
“말 들을 걸 그랬네.”
“집에 들렀다가 다시 올까?”
“굳이 나 때문에? 그럴 필요 없어. 시간 애매해지면 어쩌려고.”
“케이. 언제부터 시간 약속 잘 지켰다고 그래.”
그래도 오늘은 다르지~ 타치카와는 아키요시의 대기실을 살피듯 두리번거렸다. 뭐해? 내가 둔 겉옷이 없나 살펴봤어. 있을 법한 가정이군. 그리고 아키요시는 책을 덮곤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본부장실 가볼래? 네 옷은 없겠지만, 시노다 씨 옷은 있을 거 아냐.
“그래서 와주셨다는 거군.”
“완전 똑똑하지 않아? 아키.”
“빌려줄 테니 나갈 때까지 얌전히 앉아있도록 해.”
예이~ 힘 빠진 소리와 함께 둘은 손님용 소파에 편하게 앉았다. 시노다는 제자 둘이 그를 곤란하게 만들더라도 언제나 애매한 웃음과 함께 아슬아슬한 부분까지 허용해 주었다. 보더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 일상 중 부분은. 아키요시는 그 부분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곁을 내어주고 정신력과 정성을 뜯어 나누어 주는 ‘상냥’이 좋았다.
“오늘 즐겁게 놀아, 아키. 케이.”
이미 오전에 생일 축하를 마친 시노다는 서류 처리를 멈추지 않은 채로 둘의 다음 일정을 언급해주었다. 오늘은 아키요시의 생일이었고, 또래 친구들과 왁자지껄한 저녁 약속이 잡혀있다는 걸 알았다.
아키와 케이는 생일이 고작 3주 차이라 함께 챙기는 듯한 기분이 들지. 둘 다 소중한 제자이니 가능하다면 즐겁게 하루를 보내면 좋겠다. 방위 임무 시프트 조정을 도와주었다는 건… 키도나 린도에겐 굳이 티 내지 않았다. 알고 있을 듯싶지만….
“네, 고마워요. 시노다 씨는… 안 되시는 거죠?”
“그렇지.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일정을 비울 수가 없구나.”
“아쉽네요.”
진심으로 아쉬운 표정의 아키요시에게 시노다는 시선을 맞춰 웃어주었다. 당일은 불가능하지만, 다음에 꼭 시간을 내보마. 그리 약속해주면 아키요시도 만족했다는 미소를 지어주었다.
정말 그걸로 만족해, 아키요시?
타치카와는 깔끔하고 깨끗하게 사제시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기류만이 흐르는 이 분위기가. 놀랍게도 고까웠다. 아니 놀랍지는 않았다. 아주 소량의 친밀함 마저 아키요시와 그의 사이에 불순물처럼 낀다 느껴지면 불쾌해졌다. 웃음소리를 뱉어내고 싶어질 정도로. 아키요시, 아키요시, 아키요시와는. 그와 제가 두 다리로 뛰어다닐 수 있는 어렸을 적부터 관계가 시작되었다. 그러니까내가먼저였다는소리야. 우선순위는 타치카와가 위일 게 분명하잖아. 모든 1위는 제 몫이었다. 당연히 타인은 저희의 사이에 껴드는 위치였고 타치카와는 영역을 침범당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요지가 뭐냐 하면 순서라는 소리였다. 아키요시가 스승을 좋아해봤자 둘은 가능성도 여지도 없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짜증 난다니 제 성격이 이렇게나 나빴었군.
내가 고백하면 어떡할 거야? 타치카와의 말에 시노다는 표정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대답도 물론 해주지 않았고. 아키요시가 고백하면 받아줄 거야? 그 질문에 시노다는 평온한 투로 입을 열었다. 그런 쓸데없는 가정 좀 묻지 말아라. 타치카와는 웃고 말았다. 진짜 웃겼으니까. 그럴 일이 일어날 리 없다는, 상상도 못 하는 저 얼굴을 보아라. 웃음이 안 나게 생겼나?
시노다 씨는 오롯이 그가 책임져야만 하는 소유물에 막중한 감정을 느끼는 듯했다. 시노다 루카, 린도 요타로. 그런 것들. 다른 이가 도움을 줄 리 없어 자신만이 손댈 수 있는 외로운 위치의 무언가. 다른 예를 들어볼까? 애정을 주되 애착은 갖지 않는 제자들과의 관계가 여기에 있다. 자신은 일일이 적기에도 귀찮은 많은 이들이 있으며 아키요시는 가족은 없으나 의지 가능한 주변인이 많았다. 제자가 되기 전부터 그는 썩 괜찮은 상태라 과연 동갑들과 했던 고민 상담을 스승에게 했을지도 미지수였다.
챙겨줘야 하는 귀찮지만 귀여운 제자 둘. 타치카와의 양심 없는 주관화는 대충 들어맞을 것이다. 타치카와는 단순한 사람이라 그 사실을 상기하니 다시 유쾌한 기분이 되어 편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시노다에게서 빌린 짧은 기장의 갈색 재킷은 아마 원주인에게 다시 돌아가진 못하겠지만, 적당한 두께감이 마음에 들었다. 아키요시가 그 겉옷이 타치카와에게 어울린다고 해서 그 또한 마음에 찼다.
“생일 축하해.”
타치카와가 걸음을 멈추면 아키요시도 멈추었다. 거리를 좁혀 다가온 건 아키요시 쪽이었고 상대의 어깨를 잡은 채로 고개를 숙인 건 타치카와 쪽이었다. 아프지 않게 부딪친 이마는 둘의 앞머리 덕분에 살끼리 맞닿지는 않았다. 타치카와가 만족의 숨소리를 쉬자 아키요시는 눈을 굴려 그를 올려다봤다. 어딘가 들뜬 얼굴은 곧 파티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갑자기 왜 이래?”
“이따 재밌을 것 같아서.”
“오늘 몇 시까지 놀 거야? 너무 늦으면 케이 넌, 본가 들어가기 좀 그런가.”
“안 들어가면 돼.”
“또 내 집에서 얹혀 자려고?”
차가운 공기를 실은 바람이 부는 건 느껴졌다. 다만 맞닿은 사이로 불어 들어오지 않아서 기온은 비교적 따뜻하다는 착각이 들었다. 타치카와가 말했다.
“아키, 잘 들어 봐.”
“듣고 있어.”
멀리서 솨아, 하고 나뭇잎끼리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잎은 한순간 길거리의 행인에게 정경으로 남은 뒤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볼품없는 쓰레기가 되겠지. 누군가와 닮아있는 순리와도 같았다. 타치카와는 말없이 눈을 깜빡이며 목에 얹혀버린 단어를 꺼내기 위해 노력했다. 가까이서 풀벌레가 시끄럽게 울었다. 귀가 쨍했다. 어두운 초목의 소리는 어딘가 익숙한걸. 운치 있다고 보아도 좋을까. 해는 다 져버렸음에도 가로등은 여전히 켜지지 않았다. 빛을 저장할 수 없는 탁한 아키요시의 눈동자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타치카와가 말을 전부 마치자 아키요시는 딸깍, 옆으로 고개를 비틀었다. 시선은 타치카와 너머의 하늘을 주시하며. 그가 보는 하늘엔 별도 행성 국가도 아닌 재미없는 구름과 게이트의 흔적만이 존재하려나. 타치카와의 기억이 흐릿해 정확하진 않으나 아키요시는 아마도 거의 웃는 표정으로 가볍게 말했다.
“나도 네가 좋아.”
그러니 우린 앞으로도 계속 가장 가까운 사이로 남자.
친구
23.08.28, 09.13